트럼프 행정부와의 접점을 위해 방미중인 한국 기업인들을 맞이한 것은 10억달러짜리 청구서였다. 이 자리에 있었던 기업인들 상당수가 '70년 동맹국가에 대한 예우가 이런 수준이냐'고 기막혀했다는 것이 후일담이다. 적극적인 대미 투자국가라는 점을 들어 미국의 관세압박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으나, 오히려 대미 무역흑자 규모를 돌아보라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미국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변하려는가.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는 매 순간 터져나오는 트럼프발 뉴스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오랜 기간 익숙하게 접했던 미국의 행보, 선택과는 확연히 다르다. 잘 참아오던 미국이 왜 욕심을 감추려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일부러 미치광이 역할에 몰입하는 모습이다. 지금까지의 세계관으로는 이해불가다. 2차 세계대전이후 전세계는 '절대패권 미국, 착한나라 미국'이라는 대전제 아래 세상의 일들을 이해해 왔다.
기존의 세계관은 거부당했다.
지난 세기동안 미국이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국제적 선함'이다. 종교적 기반이기도 하지만 경제적 자신감, 여유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오랜 기간동안 어떤 행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미국은 국가이기주의로 보일만한 선택은 가급적 자제하며 리더국가로서의 품위와 품격을 지키려 노력했다.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를 위해 남의 나라 전쟁에 기꺼이 병사들을 보냈으며, 폐허와 기아, 미개발 상태의 국가들이 손을 내밀면 없는 돈이라도 만들어 지원했다.
그동안 마냥 퍼주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노력과 희생을 바탕으로 냉전시대 패권을 굳건히 할 수 있었으며, 달러 기축통화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금융시장 주도권도 단단하게 만들었다.
줄잡아 보면 미국은 2차세계대전(1939~45년)이래 80년이상 개별 국가로서 또는 국가연합으로서 세계질서를 위해 노골적인 욕심은 꾹꾹 참았다.
그동안의 결과물은 어떻게 보일까.
적어도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이 '국제적 선함'을 지키느라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시민들을 골병들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은 아닐까.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가들이 값싼 물건들을 만들어대자 미국의 제조업 기반이 고사당했다. 괜찮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이 마약에 빠져들었다. 이민 노동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저임금 일자리도 쉽지 않다. 부자들의 너그러운 자선행위였던 '팁 문화'는 자선이 아니라 압박으로 변해 부담스러운 수준으로 치솟았다.
지금 트럼프가 보이는 행보는 어찌보면 오랜 기간 미국에 의존해(트럼프는 아마도 기생한다고 보는 듯하다) 윤택해진 전세계 국가들에게 '80년짜리 불로소득'에 대한 값을 치르라는 청구서날리기로도 읽힌다.
트럼트의 분쟁해법은 어쩌면 단순하다.
그의 해법은 자본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힘의 논리'와 이 힘을 제공한데 따른 '적정한 청구비'가 골자다. '미국은 더 이상 국제적 선함만을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읽혀진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의 무대인 가자지구를 미국특구로 만들어 양측의 분쟁을 영구히 정지시키겠다는 해법은 바로 이 '힘'과 '청구서'의 조합이다.
가자지구에서 쫓겨날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접경국가들이 나누어 감당하라는 것은 '수혜자 부담' 원칙을 작동시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해법 역시 마찬가지다.
더 이상 전쟁을 하지 말 것. 미국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본격적으로 개입할테니 알아서 판단할 것. 여기에 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크라이나 역시 마지못해 받아들이기 위한 명분 찾기에 골몰하는 모습이다.
종전 후 질서찾기 구상은 더 대단하다.
미국은 전쟁을 마무리한 후 폐허의 우크라이나 재건 시장에 군침 흘릴 각국들에게 '시장참가비'를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나아가 우크라이나에겐 '전쟁 지원, 평화지대 조성' 등에 들어간 미국의 비용을 희토류로 치르라고 강요한다.
하나같이 그동안 없던 해법들이다.
이 흐름대로라면, 이 해석이 맞다면...
한국은 이제 큰 일이다.
지난 80년동안 미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수혜를 입은 곳은 누가 봐도 '경제대국 한국'이다. 80년짜리 청구서를 앞두고도 여전히 정쟁에만 몰두하는 여의도 정치권의 '느긋함'이 너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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