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6세인 김형성(가명)씨는 요즘 밤잠을 설친다. 은퇴를 2년 앞두고 집을 줄여서 남은 돈으로 노후생활의 밑천으로 삼고 싶지만 여의치 않아서다. 김씨가 살고 있는 집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 전용면적 125㎡ 규모의 아파트로 가격은 5억원 중반대다. 김씨가 줄여서 옮기고자 하는 집은 같은 단지의 전용면적 84㎡ 아파트다.
문제는 125㎡와 84㎡ 간의 가격 차이가 1억원 밖에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과 3년전 만해도 3억원 이상 차이가 났으나 최근 대형아파트 값이 급락하면서 그 격차가 엄청나게 좁혀졌다. 작은 집으로 갈아타기 위한 취득세와 중개수수료 등 각종 비용을 감안하면 손에 쥐는 게 별로 없다. 아파트 규모를 줄여 노후를 재설계하려는 계획이 무산되는 건 아닌지, 김씨는 눈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김씨처럼 720만명에 달하는 베이비부머들의 연령층은 50대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에 따르면 베이비부머의 총자산은 평균 3억4000만원. 이 중 77%(2억6000만원)가 부동산에 편중돼 있고 금융자산은 23%(8000만원)에 불과하다. 이러다보니 은퇴 후 막상 생활에 필요한 노후자금이 거의 없다. 자산이라곤 달랑 아파트 한채가 고작이다.
지금까지 베이비부머들에게 부동산은 자식처럼 '든든한 언덕'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 부동산에 배신당한 느낌이다. 그동안 베이비부머들은 작은 집이라도 사서 넓히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삼았고, 그 과정에서 중산층이 됐다. 일종의 '자산 사다리'(Property ladder)를 이용한 셈이다.
처음의 값싼 주택 취득은 자산 사다리를 타는 출발점이며 크고 비싼 주택은 사다리의 꼭대기다. 높은 사다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베이비부머들이 지금 사다리의 정점에 와 있다. 한때 자산 사다리 타기에 성공했던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은 믿었던 신화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은퇴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는 사다리에서 서서히 내려오고 싶다.
하지만 불안한 사다리에서 내려올 수가 없다.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출구전략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큰집을 팔아 작은 집으로 옮기는 '다운사이징'을 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큰 집만 상대적으로 더 떨어졌기 때문이다. 베이비부머들은 현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의 화려한 시절은 잊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시장 흐름에 맞서기보다는 순응하는 것이 좋다. 부동산시장은 본격적으로 저성장 체제에 접어들었다. 가격이 잘 오르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아파트처럼 한꺼번에 시세차익을 챙기는 자본이득형 상품은 줄여나가야 한다.
대신 매달 월급처럼 나오는 수익형 자산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 행복(이익)은 한꺼번에 받지 말고 여러번 나눠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거래 두절과 가격 폭락이라는 이중 악재에서 당장 부동산 리모델링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부동산은 사이클의 세계다. 내릴 때가 있으면 오를 때도 있는 법이다. 노후 자산재설계는 3∼5년 계획을 짜서 여유를 갖고 실행을 하는 것이 좋다. 속담에도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너무 서두르면 도리어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4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흔들리는 '자산 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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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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