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2008년 초,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주요 소비재 기업들은 하나둘씩 가격인상 대열에 합류했다. 정권 교체기이기도 하거니와 원자재값 상승이 맞물린 탓이다. 그런데 '가격인상 도미노'에 오히려 가격인하를 검토한 기업이 있었다. 이승한 회장이 이끄는 삼성테스코 홈플러스였다.
#2. 5년이 지난 2013년 2월, 또 한번 새 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남들과 다른 길'을 표방하며 홈플러스를 16년간 진두지휘했던 이승한 회장은 공식 '퇴장'을 선언했다. 국내 유통업계 최장수 최고경영자(CEO)의 현역은퇴가 발표된 순간이다.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67)은 회사 창립기념일인 오는 5월15일 대표이사 자리를 내놓기로 했다. 후임엔 도성환 현 테스코 말레이시아 대표가 선임된 상황. 퇴임 이후에도 홈플러스그룹 회장직과 사회공헌재단인 e파란재단 이사장직은 그대로 유지한다. 테스코 홈플러스 아카데미 회장 겸 석좌교수, 테스코그룹의 전략경영을 위한 경영자문역을 새로 맡는다.
최장수 CEO에 걸맞게 이 회장은 16년의 세월을 홈플러스와 동고동락했다. 과연 떠나는 '16년 홈플러스맨'에 대한 재계의 평가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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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플러스 산 증인'…업계 12위서 2위로 '점프'
지난 1970년 삼성그룹 공채 11기로 입사한 이승한 회장은 삼성물산 런던지점장,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신경영추진팀장을 거쳐 1997년 홈플러스의 전신인 삼성물산 유통부문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이후 1999년 테스코와 삼성그룹의 합작회사인 홈플러스를 창립한 이래 현재까지 16년간 회사를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이 회장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업계 12위에 불과하던 홈플러스를 14년 만에 연매출 12조원대 국내 2위 마트로 키웠다.
이에 근거해 2005년 3월에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초청으로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강연하는 등 세계 각국에 홈플러스의 성공비결과 기업문화를 알렸다.
2008년의 경우 연간 6조원 이상의 매출을 통해 점당 매출 1위, 매장 면적당 매출 1위, 업계 최단기 매출 1조원 돌파 등 다양한 기록을 세우며 홈플러스를 '유통업계의 강자'로 성장시켰다. 당시 독일은행이 발간한 '아시아 유통산업보고서'만 보더라도 홈플러스는 전세계 테스코 1000여개 매장 중 평당 매출에서 최고기록을 세워 '아시아에서 가장 유망한 유통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회장은 또 창고형 일색이던 시장에 원스톱 쇼핑과 원스톱 생활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하는 2세대 '가치점'(value store)을 처음 알렸으며 이후 3세대 '감성점', 3.5세대 실험 점포 '그린스토어' 등 끊임없는 혁신을 추구했다.
2003년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목천물류서비스센터를 오픈해 유통업계의 물류혁명을 이끌었다. 목천 물류센터는 최대 22톤까지 적재할 수 있는 대형트레일러 및 드로바(Draw bar)를 운영, 운송과 상하차 횟수를 줄여 효율성 면에서 기존업무 대비 4배나 향상시켰다.
◆'톡톡 튀는' 역발상 경영…이승한표 승부수
홈플러스의 산 증인인 이 회장은 그동안 '큰 바위 얼굴 경영론'(성장의 얼굴과 기여의 얼굴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자는 경영론)', '구두론'(신임 점장에게 구두를 선물해 발로 뛰는 현장경영을 하라는 경영론) 등 다양한 경영스타일을 선보였다. 하지만 최적의 이승한표 경영방식은 '역발상 경영'이 꼽힌다.
2011년 선보인 '가상스토어'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이 시스템은 스마트폰으로 상품의 바코드나 QR코드를 촬영하면 바로 홈플러스 모바일 앱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쇼핑을 할 수 있도록 한 신개념 점포다.
당시 이 회장은 서울의 지하철 2호선 선릉역에 처음 가상스토어를 선보이면서 "홈플러스를 여러분의 집 안에 들여놓게 해드리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이 같은 스마트 가상스토어는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을 뿐 아니라 홈플러스 투자회사이자 세계 3대 유통업체인 영국의 테스코로 역수출돼 지난해 런던올림픽 기간 중 개트윅 공항에서 시범 운영되기도 했다.
대형유통업체 중 최초로 모든 직원의 정년을 55세에서 60세로 연장한 것 역시 이 회장의 '역발상 경영'의 또 다른 사례다. 지난 2011년 12월부터 시행된 파격적인 정년연장 정책으로 이 회장은 퇴직위기에 처한 홈플러스 임직원 2만1000명을 구제했다.
이후 5년간 2000여명이 더 정년연장 혜택을 보게 됐고 이에 따른 고용비용만 약 130억원 늘어나게 됐지만 이 회장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른 기업들이 경기침체와 소비위축을 우려해 고용을 축소하거나 임금인상을 자제하는 움직임이 많았던 시기임에도 당시 이 회장의 역발상 고용은 국내 고용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퇴임의 진실…경질인가 용퇴인가?
유통업계 최장수 CEO에 걸맞게 이 회장을 둘러싼 재계의 평가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번 이 회장의 공식 퇴임이 최근 대형마트 영업규제 이후 악화된 실적과 관련해 '경질됐다'는 일부의 분석도 나온다.
홈플러스는 이마트·롯데마트와 달리 외국계 법인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정부의 영업규제에 정면으로 맞서기도 했다. 체인스토어협회장이기도 한 이 회장 역시 "한국경제가 겉으로는 시장경제를 표방하지만 안은 빨갛다"며 "대형마트 영업규제는 공산주의에서도 하지 않은 정책"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럼에도 홈플러스는 영업규제에 따른 실적악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회사는 지난해 11월 경기침체와 정부규제 등이 겹치면서 매출 감소로 인해 전국 지역본부를 총괄하는 영업운영부문장을 교체하는 등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지난해 2분기 홈플러스 총매출액(홈플러스테스코 제외)은 2조104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0.5% 줄었고, 영업이익은 751억원으로 38.7% 급감했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 1월 대형마트 빅3 중 홈플러스만 창사 이래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하기도 했다.
영업 쪽에선 기습개점으로 논란에 휘말린 것이 이 회장의 '퇴장결심'을 앞당겼다는 얘기도 나온다. 최근 서울 성수점에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를 개점하면서 마치 식당을 오픈한 것처럼 위장해 공사를 진행한 후 새벽에 기습적으로 문을 열어 중소상인들의 비난을 받았던 것.
이 같은 정황으로 테스코가 이 회장을 사실상 경질한 후 홈플러스의 대대적인 체질개선 작업에 나선 게 아니냐는 추론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에선 테스코가 실적부진을 이유로 한국시장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가설도 나돌았다.
하지만 홈플러스 측은 이 회장의 은퇴발표와 관련 "경질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영국 본사에서도 인정한 명예로운 은퇴"라는 입장을 최근 밝혔다. 테스코 본사 역시 "이 회장 본인이 은퇴시기를 결정했다"고 일축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7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