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필 연구위원
서동필 연구위원
【30 VS 40】 마흔 살이 된다는 건 서른 살이 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을 갖는다. 둘 다 인생의 이정표쯤으로 삼을 수 있는 의미있는 나이인 동시에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한 느낌에 우울해지기도 하는 나이다. 허전함을 느끼는 두 나이의 공통 키워드는 상실이다.

서른 살이 되면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심리적 동요의 한 가운데에서는 ‘청춘’이란 단어가 핵심으로 자리잡는다. 

꾸미지 않아도 청춘이란 사실 자체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웠던, 인생의 봄날 같던 시절이 가고 이제 청춘이라 하기에는 뭔가 미심쩍은 30대가 된다는 사실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그리고 이제 정말 어른(?)이 된다는 사실과 이에 따른 막연한 책임감에 거부감이 생기기도 한다. 청춘 상실의 아쉬움이 서른 살 동요의 핵심이다.

마흔 살이 되는 사람들 역시 뭔가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허전하다. 이미 서른 살에 놓아버린 청춘에 이어, 이들이 잃어버린다고 행각하는 것은 ‘젊음’이다. 더 이상 젊지 않으며, 이제부터는 인생이 내리막길을 걷는다는 생각에 아쉬움의 느낌으로는 부족한 두려움까지 느낀다. 

봄날 같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그래도 뜨거운 여름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서른과 달리, 봄도 여름도 왠지 다 지나간 것 같은 마흔은 분명 서른과 다른 느낌을 준다. 

서른 살이 청춘의 상실로 아쉽다면, 마흔 살은 젊음의 상실로 두렵다. 아쉬움과 두려움은 다르다. 아쉬움이 깊어지고 좀더 절실할 때 두려움이 되는데, 아쉬움은 그냥 시간에 맡겨 둬도 되지만 두려움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는 가능하지만, ‘두려우면 두려운 대로’는 힘들다. 그래서 서른보다 마흔이 중요하다.

특히나 최근처럼 100세시대다 해서 인생 사이클이 점점 길어지고 있는 터에 맞는 마흔 살은 이전 세대의 서른 살만큼 혼란을 겪기도 하고, 제 2의 사춘기로 표현할 만큼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흔 즈음은 제 2의 인생을 사는 것까지는 몰라도 준비하기에는 딱 좋은 나이다. 이 역시 서른보다 마흔이 중요한 이유다.

마흔, 불혹이 아닌 유혹의 나이


【불혹이 아닌 유혹의 나이, 40】누가 40을 이런저런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불혹(不惑)의 나이라고 했던가? 공자라는 성인(聖人)급의 현자(賢者)가 한 말이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겠지만, 대략 2,500년 전에 살았던 공자 시대의 나이개념을 오늘날에 그대로 가져와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평균수명이 채 40을 넘지 못했던 시대의 나이 40과 100세시대의 40이라는 나이개념이 같을 리 없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오늘날 40대는 이런저런 세상일에 흔들리고, 치이고, 떠밀리며 불혹의 굳은 심지를 가진 사람이 드문 듯 하다. 실제로 40대는 생활의 주요 기둥인 직장과 가족, 건강 등에서 꽤나 심한 변화(대부분 부정적)를 경험하고, 심한 심적 갈등과 혼란에 힘겨워 한다.

직장에서는 어느새 중견의 위치에 올랐지만, 이는 젊고 패기있는 부하직원과 눈치를 살펴야 하는 상사 사이에 끼였다는 사실에 다름이 아니다. 부하직원이 입사할 때마다 왠지 위축되고 불안하며, 상사가 혹여 질책이라도 하면 ‘참 밥벌어 먹고 살기 힘들다’며 술과 담배가 절로 생각이 난다(40대 81.5% 직장에서 스트레스 느껴, 33.5% 스트레스 때문에 술 못 끊어).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 아내는 힐끗 쳐다보고는 아이들 간수하느라 남편은 뒷전이다. 아내와 대체 언제 맘 편히 영화 한 편, 밥 한 끼 했는지 기억조차 가물하다(우리나라 남자와 여자의 평균 이혼연령 각각 45.4세, 41.5세). 아이들은 이제 한 참 돈들어 갈 일만 남았다(40대 79.8% 교육비 부담스러워).

그동안 그럭저럭 건강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슬슬 몸도 여기저기서 탈이 나기 시작한다. 40대의 41.9%가 비만이며, 31.6%는 당뇨다. 우울증도 10명 중 1명(9.1%)이 앓고 있다. 그럼에도 정기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사람은 32.6%에 그치고, 45%는 정기 건강검진도 받고 있지 않다.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속으로 곪고 있는 40대다.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게 아니다. 직장에서 힘겨워 하고, 가정에서 위로받지 못하고, 때로는 가끔씩 아프면서 그동안 살아왔던 삶에 대한 회의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40대를 불혹이 아닌 유혹의 심리상태에 빠뜨린다는 점이다. 회의와 불안감에 자아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새로운 자아를 갈망한다. 누군가를 위한, 혹은 누군가에 의해 보여지는 분신과 같은 삶이 아니라 진정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증가하는 40대다.

마흔, 불혹이 아닌 유혹의 나이

【40에 다시 배우는 걸음마】자, 마냥 아쉬워하고 두려워하고만 있을 마흔 살이 아니다. 아직도 인생은 살아온 만큼 살아갈 수 있으며, 이제부터 사는 인생은 이왕이면 분신이 아닌 나를 위해 사는 것을 목표를 세울 때다. 이를 위해 40이 가져야 할 몇 가지 마음가짐을 짚어보자.
첫째, 현재가 중요하다.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현재를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야 한다.

플라톤 : 스승님, 보리이삭이 다 크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가면 지금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머뭇거렸죠. 그러다 결국은 아무것도 따지 못하고 보리밭을 다 건너고 말았습니다. 
소크라테스 : 모든 희망을 내일에 걸지 말라. 네가 숨 쉬고 있는 지금이 가장 소중하다.

비오는 날 아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손에 쥘 수 있는 순간, 환한 햇살과 즐거운 재잘거림이 함께 하는 순간, 파란 새싹과 연분홍 꽃을 기다리며 화분에 물을 뿌리는 순간 등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바로 이 순간이 주는 즐거움이다. 지나간 과거와 애매한 미래에 현재를 저당잡힐 필요가 없다.

째, 중간의 아름다움을 얻었다. 40은 참으로 애매한 나이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고, 딱 중간이다.

젊음과 늙음의 중간에 있으며, 열정과 관록, 도전과 포기, 외양과 내면, 생기와 품격, 지식과 지혜의 사이 그 어디쯤에 40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도저도 아님을 달리 보면 이도 저도 다 가지고 있음이기도 하다. 

청년이 가지고 있는 젊음과 패기는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뒷방에서 군불이나 지피고 있는 늙음과 관조도 아니다. 아직은 도전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또한 상황을 판단하며 적당히 포기의 묘를 부릴 줄도 아는 나이다. 지식을 넘어 품격의 지혜를 가지고 있기도 하며, 외양의 아름다움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볼 줄도 아는 시기다. 

또한 40은 무모함으로 흐를 수 있는 열정을 제어하고, 상황에 대한 통찰력과 직관을 갖게 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기도 한다.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위축되는 40이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한없는 가능성을 가진 40이다.

셋째, 아직 중간밖에 오지 않았다. 굳이 인생 100세시대가 아니더라도 이제 겨우 반이 지났을 뿐이다. 40에 대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나이와 젊음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끝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면 그 뿐이다. 변화하지 않고 그 자리에 정체된 것을 진정 두려워해야 한다. 노자는 눈이 수북이 쌓이다 결국 부러지고 마는 굵은 가지와 때때로 휘어지면서 눈을 털어내는 가느다란 가지 사이에서 저항과 정체보다는 변화와 성장이 낫다고 봤다. 

우리는 성장할 뿐 늙지 않는다. 하지만 성장을 멈춘다면 비로소 늙게 된다. 
 -랠프 윌도 에머슨-

넷째,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자. 벼룩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하였다. 책상 위에 벼룩을 올려놓고 책상을 손바닥으로 쳤다. 놀란 벼룩들이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고, 어떤 벼룩은 자기키의 100배까지도 뛰었다. 

그런 다음 벼룩 위에 유리덮개를 설치하고 책상을 쳤다. 처음에는 높이 뛰던 벼룩도 계속해서 머리가 유리에 부딪치자 나중에는 부딪치지 않도록 스스로 뛰는 높이를 조절했다. 

높이를 더 낮춰보았다. 이번에도 벼룩은 몇 번을 부딪치자 뛰는 높이를 더 낮추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계속 덮개의 높이를 낮추다가 나중에는 유리덮개를 아예 치워버리고 벼룩이 뛰는 모습을 관찰했다. 놀랍게도 벼룩은 책상을 아무리 세게 쳐도 마지막 유리덮개의 높이 이상으로는 높게 뛰지 않았다.

40이 되었으니 스스로 이런저런 한계를 짓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봐야 한다. 지금 뭔가를 새로 시작해도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난 안돼’, ‘난 그럴 만한 능력이 없어’라며 스스로 한계짓고 있지는 않은지. 40이라는 유리덮개를 머리 위에 스스로 설치하고 그 이상으로 아예 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혹시 용기가 없어서 그냥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다섯째, 무엇보다 내가 가장 소중하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부모님, 선생님이 바라는 것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커서는 사회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인생의 중반에 도달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직장, 가족, 친구 등 모든 관계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야한다는 압박감과 책임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에 맞도록 나를 재단하고 틀에 끼워 맞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가족이 자신을 몰라주거나 직장에서 해고라도 당할라치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울분과 분노를 터트린다. 문제는 그들 모두를 100%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단 사람 바로 ‘나’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고, 주위 사람이 원하는 사람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주위 사람과의 조화와 순응도 필요하지만, 나를 버리면서까지는 곤란하다.

종오소호(從吾所好) :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좇아가리라. 공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면 마부라도 기꺼이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할 때 사람들은 절망을 느낀다. 가장 깊은 절망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멋지게 나이드는 법 46’, 키에르케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