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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빼고 다 오른다. 그런데 짤린다? 대한민국 비정규직 800만 명은 늘 조마조마하다. 정확히 823만 명이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어마무시한 숫자다. 혹시 생각해 본 적 있는가.
하루에 몇 명의 비정규직을 만나는지. 우리는 일상처럼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만든 커피를 마시고, 아무렇지 않게 일당제 아주머니가 차려준 식사로 끼니를 해결하며, 당연한 듯 용역업체 소속인 경비아저씨에게 맡겼던 택배를 찾아온다. 그들이 최저임금을 보장받지 못하는 저임금 노동자라거나 부당한 대우에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생각은 터부시된다.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권리를 위해 청계광장을 점령하며 궐기해도 소용없다. 그들이 건넨 전단은 그저 종이에 불과하며, 처절하게 외치는 말들도 소음이 될 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아메리카노의 가격이 합당한지’, ‘오늘 점심 메뉴는 무엇인지’, ‘내 소중한 택배가 도착했는지’ 따위다. 어느 순간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곧 나 자신의, 내 가족의 혹은 내 아이의 현실로 닥쳐오리라는 의심은 전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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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트>는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밀고 나타났다. ‘부당해고’, ‘노조’, ‘파업’, ‘노동문제’ 등 고개를 돌리고 싶은 단어들을 ‘엄마’, ‘아줌마’, ‘알바생’, ‘88만원 세대’라는 매우 보편적이면서도 친숙한 이미지들로 치환해 스크린에 담아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마땅히 분개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준다. 익숙하지만 외면했었던 장면들 때문에 영화 초반부터 눈물이 터졌다. 고딩 알바생 태영(도경수 분)의 급식카드가 찍히지 않았을 때를 기점으로, 104분의 러닝타임 동안 눈물샘이 고장난 상황과 머리 뚜껑이 열린 상태를 오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우리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
아,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났다. 지난 달,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나눈 <카트> 부지영 감독과의 수다로 당신을 초대한다.
◆ 여성이 만든 ‘여성 노동영화’, 상업영화로써는 첫 도전
Q. 영화 <카트>의 시나리오를 2년 전에 받으셨다고 들었다. 시나리오의 첫 느낌은 어땠나.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저는 두 번째 장편을 준비 중이었어요. 이 시나리오를 딱 받고 ‘소재가 굉장히 신선하다’고 느꼈어요. 더불어 ‘여성’과 ‘파업’이라는 낯설고 어려운 소재로 상업영화를 만든다는 자체가 신선하면서도 용기 있는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죠. 게다가 ‘명필름’의 기획이야! (웃음) 모든 것이 결정을 주저하지 않게 했어요.
Q. 이 영화를 단순히 갑과 을, 저항과 투쟁, 시스템과 개인이라고만 바라보는 건 편협한 것 같다. 나름대로 중점을 둔 부분이 있나.
알다시피 <카트>에는 여성들이 대단히 많이 나와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해고를 당하고 파업을 진행하는 부분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야 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여자들이 우정, 동료애, 유대 등을 나누는 장면을 흥미 있게 다뤄야 한다고 봤죠. 그래야 극 후반 캐릭터들이 감정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여성들이 공유하는 문화나 놀이를 잘 묘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Q. 연기파 여배우 염정아, 문정희, 김영애 외에 김강우와 보이그룹 ‘엑소(EXO)’의 디오(D.O. 도경수)도 출연한다. 아무래도 ‘색깔’있는 영화라 캐스팅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어땠는가.
의외로 어렵지 않았어요.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잘 받아들인 덕택이겠죠. ‘명필름’이 만드는 영화에 대한 믿음도 있었던 듯 싶네요. 저도 출연 배우들이 흔쾌하게 결정해주셔서 놀랐어요.
Q. 특히 염정아는 평소 화려한 역할을 맡았던 배우인데 감독님의 선택을 받은 이유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영화 <범죄의 재구성>, <오래된 정원> 속 정아씨의 캐릭터를 좋아해요. 염정아라는 배우는 단순 캐릭터 묘사에 그치지 않고, 역할에 밀착된 생활형 연기를 만들어내요. 또한 본인이 결혼을 했고, 애도 낳아서 선희 역을 잘 표현할 것이라는 느낌이 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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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주연배우 염정아(선희 역), 문정희(혜미 역), 김영애(순례여사 역)가 이전 영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에서 작업했던 신민아, 공효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배우가 다른 게 아니라, 일단 작업 환경이 달랐죠. (하하) 각 배우마다 디렉션 방법이 달라요. 민아 씨는 되게 디테일한 주문을 듣길 원하는 반면에 정아 씨는 묵직한 것을 말씀드리면 본인의 스타일로 흡수하고 연기로 표현해주시죠. 게다가 김영애 선생님은 워낙에 경험이 많으신 분이라 다 알아서 하셨고요. (웃음)
Q. 출연하는 여배우 중에 자신과 닮은 역할이 있나.
없어요! (단호) 선희는 저에 비해 조용해요. 혜미는 저에 비해 강단 있고요. 옥순(황정민 분)은 저보다 웃기고, 미진(천우희 분)은 저랑 비교할 수 없게 나이가 어려요. 내가 조금 더 나이 들면 순례랑 살~짝 비슷할까. (웃음) 저는 순례 캐릭터를 모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어요. 순례를 통해 편하게 늙어가는 선배의 느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들을 일상으로 알려주는 사람. 저도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Q. 촬영 시기가 겨울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현장감이 더 살아났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여배우들이다 보니 물대포를 맞거나, 폭력을 동원하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힘들지는 않았나.
어휴, 힘들었죠. 마지막 장면을 4일 동안 찍었어요. 배우들 다 다치고, 까지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나마 그날 날씨가 좋았어요. ‘액션’을 외치자마자 그냥 서있던 분들도 갑자기 나동그래지고, 드러누우면서 재미나게 촬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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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직업, 다른 사연… ‘우리네 이야기’
Q. 극 중 선희의 캐릭터가 반전되는 느낌이 들더라. 처음에는 소극적이다가 나중에는 혜미를 이어 노조를 주도하게 된다. 무엇이 그녀를 심리적으로 변화하게 만들었을까.
선희는 애초에 심지가 굳은 사람이에요. 혜미처럼 드세고 강단 있는 캐릭터는 아니지만요.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기까지 오래 걸리더라도 한 번 마음을 주면 그 것을 오래 간직하는 사람이 바로 선희죠. 그래서 선희에게는 과정이 중요해요. 회사의 비열한 행동들을 겪고, 마트를 점거하는 동안 동료들과 유대를 나눴던 모든 순간이 복선 아닐까요. 아들 태영이도 그런 계기를 주죠. 선희가 파업에 가담하게 되면서 순식간에 삶이 바뀌었지만, 그것은 일밖에 모르던 그녀의 삶에 굉장히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봐요.
Q. 여주인공들의 남편이라는 존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최과장(이승준 분)을 통해서 우리네 아버지들을 잠시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여자들의 우정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했나.
사실 어떤 버전에서는 각자 남편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시나리오 모니터링을 거치면서 남편의 역할은 기능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측 가능한 것들을 한 컷 내지 두 컷으로 내보내는 것은 무의미하고 소모적이라고 여겼습니다. 스토리 전개상 그녀들의 남편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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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카트>가 막 크랭크인 됐을 때, 태영(도경수 분)과 수경(지우 분)이 풋풋한 로맨스를 펼친다는 소문이 돌았다. 막상 영화를 보니 이렇다 할 애정신은 없는 것 같다. 두 사람을 보면서 가난한 애들끼리 친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묘하게 와 닿았다. 혹시 빈곤이 세습된다는 의미였나.
태영과 수경의 러브라인은 어느 순간 기정사실화 됐더라고요. (웃음) 그렇게 기사 낸 적 없는데도요. 그 둘은 애초에 말랑말랑한 분위기가 불가능한 설정이에요. 빈곤이 세습된다는 의미도 전혀 담지 않았고요. (강조) 그냥 수경이는 용감하고 씩씩한 캐릭터예요. 급식 못 먹는다고 찌질하게(?) 앉아있는 태영이를 구제해 줄 수 있는 친구고요.
Q. 영화 속에 용역깡패가 등장하는 것은 민감할 수도 있다. 그 장면에서 관객의 시선이 꼭 닿아야 하는 부분이 있나.
원래는 용역깡패들이 상상 이상으로 무서워요. 요즘 용역업체들은 장비도 많고, 물대포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굉장히 군사적이에요. 그들이 동원된 현장은 거의 피바다가 되요. 우리 영화는 순화해서 표현했어요. 유독 신경 쓴 장면은 아이가 다치는 부분이에요.
Q. 감독님이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대사나, 아름답다고 여기는 장면이 있는지.
선희가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우리의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고. 딱 제 마음이에요. 파업하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또 떼쓰구나’라는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한 번쯤 들어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절실하게 전하고 싶었어요.
Q. 인상적인 엔딩이었다. 열린 결말의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
2년 전 받았던 시나리오와 똑같은 결말이에요. 해피도 언해피도 아닌 엔딩. 달려가면서 멈추는 장면인데요. 이미 우리 사회에 있어왔던 일이고, 앞으로도 정당한 권리들을 주장하는 싸움은 계속 될 테니까 결론을 낸다는 것에 대해서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이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고 해서 우리가 마음에 평안을 얻느냐. 아마 아니겠죠. 언해피라고 해서 불편하리라는 법도 없고요. 결국 마침표를 찍는 것은 관객들이나 투쟁하는 사람들의 몫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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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카트>가 담아온 것, 그리고 앞으로 담길 것
Q. 영화 촬영 이후, 일상에서 바뀐 부분이 있다면?
바뀌게 된 것은 없어요. 저는 항상 이런 싸움을 지지했고, 앞으로도 응원할 거예요. 다만 자료조사하면서 법적인 내용을 많이 접하게 됐어요. 그에 따라 새삼스레 생긴 소망은 ‘제발 업체들이 최저임금을 지켜줬으면 좋겠다’라는 거예요. 최저임금을 5210원으로 정해놨으면서 왜 안 지키는 것인지 왜 근로기준법과 노동법이 안 통하는 사회가 됐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그런데 웃기게도 세상이 또 굴러가요. 누군가는 계속 당하면서 사는 거겠죠. 요즘 부쩍 그런 부분이 자꾸 눈에 들어오네요.
Q. 결국 부지영 감독이 그려낸 ‘카트’의 주제는 무엇인가.
주제의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요. 다양한 지점에서, 각자가 느끼는 바가 다르겠죠. 혹자는 ‘파업할 때 대체 인력을 투입하면 불법이구나’를 알아차릴 수도 있고, 다른 이는 ‘같이 투쟁하다가도 복귀를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하고 신기해 할 수도 있죠. 그거면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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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개봉을 앞둔 현재 기분은 어떤가. 목표 관객수가 있나.
일단 100만 파티를 즐겁게 맞이하고 싶어요. 100만 파티에서 배우와 스태프 모두 모여 서로 박수쳐주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자리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사실 우리 영화의 손익분기점은 170만 명인데. (웃음)
한편, 영화 <카트>는 2007년 이랜드 홈에버 사태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됐다. 이에 대해 부지영 감독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나 전반적인 부분에서 여러 사건을 참고했다”며 “실화와 허구 분량을 나눌 수 없다”고 전한 바 있다. 이 영화는 오는 13일 개봉한다.
<사진=한누리 사진기자, 영화 ‘카트’ 포스터,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