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의료·제약분야 규제 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신산업 활성화를 위해 만들어진 신산업투자위원회가 건의한 51개 바이오헬스 규제 개선안 중 48개가 최근 규제개혁장관회의를 통과한 것. 나아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다양한 산업경쟁력 강화 방안을 담은 ‘바이오헬스케어 규제 혁신안’도 내놨다.
이에 따라 원격화상 의약품 판매시스템 도입, 임상시험 완료 전 신약 판매 허용 등 논란의 여지가 큰 개선안들이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의료·제약업계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리며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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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트리온 송도 2공장 배양실. /사진제공=셀트리온 |
◆‘원격진료’ 전초전 원격화상 의약품 자판기
지난 5월18일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5차 규제개혁장관회의 및 민관합동 규제개혁점검회의에서 정부는 신산업추진위원회가 건의한 원격화상 의약품 판매시스템 도입을 허용하기로 하고 관련 약사법 개정안을 오는 10월 발의하기로 했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약국이 문을 닫은 이후에도 누구나 약국 밖에 설치된 의약품 자동판매기를 통해 약사와 인터넷 화상통신 상담을 받은 후 일반의약품을 구매할 수 있다.
앞서 2012년부터 편의점 등 약국 외 점포에서도 20여종의 일반의약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됐지만 가벼운 증상에 시급하게 이용하는 해열·진통제, 감기약, 소화제 등 ‘안전상비의약품’으로만 한정돼 있었다. 하지만 원격화상 의약품 자동판매기로 구입할 수 있는 의약품은 일반의약품 전반으로 범위가 크게 넓어진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원격화상 의약품 판매시스템이 도입되면 약국이 문을 닫은 이후에도 사람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약을 구입할 수 있어 접근성과 편의성이 좋아진다”며 “정부가 추진 중인 원격의료와도 연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약업계는 이번 결정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의약품 자판기가 도입되면 아무래도 판매할 수 있는 루트가 넓어지기 때문에 매출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반면 의사와 약사들은 강하게 반발한다. 대한약사회,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한의사협회, 대한간호협회는 공동성명을 통해 “약사와의 직접 대면이 아닌 방식으로는 의약품 오·남용의 위험에 노출되기 쉬우며 부작용 발생 시 조치와 책임 소재도 불분명하다”며 “대면 복약지도를 규정한 현행법은 불필요한 규제가 아니라 강화시켜야 할 필수적 안전장치로 규제 개혁이 국민의 건강권을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임상시험 완료 전 신약 판매
임상시험 완료 전 신약 판매도 허용된다. 정부는 임상시험을 통한 유효성 연구를 개발단계에서 실시할 수 없는 ‘공중보건 위기대응 의약품’을 비임상시험 자료로 허가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제를 정비하기로 했다.
공중보건 위기대응 의약품은 감염병, 생화학무기, 산업상 재해로 인한 화학물질 누출 피해 등 공중보건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질병을 치료·예방하기 위한 의약품이다. 의약품 유효성을 임상시험을 통해 입증하기 위해선 해당 병원체에 사람이 직접 노출돼야 하지만 이는 윤리성 문제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임상시험 없이 동물실험 등의 자료를 토대로 효과를 확인하고 허가한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다.
이와 함께 뇌경색, 심부전, 협심증, 백혈병 등 치료가 지연될 경우 사망할 수 있는 생명위협질환 치료제 중 효과가 뛰어난 의약품은 임상2상 후 허가를 내주기로 했다. 임상3상까지 완료하기 위해선 통상 3년가량의 시간과 그에 따른 막대한 비용이 더 필요하지만 이를 줄여주겠다는 얘기다.
식약처 관계자는 “안전한 사용을 위해 임상2상 의약품의 사용조건을 제한하는 등의 장치를 마련했다”며 “지금까지 임상2상 후 허가받은 제품 중에서 안전성에 문제가 있었던 제품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대형제약업체 관계자는 “임상 과정이 줄어든 만큼 신약 출시를 앞당길 수 있기 때문에 경쟁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하지만 의료업계에선 반대 목소리가 높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지금까지 문제가 없었다고 앞으로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데 임상시험을 아예 안하거나 절차를 줄인 채 판매를 허용한다는 것은 국민의 안전과 건강에 큰 위험이 될 수 있다”며 “의료와 관련해선 규제 완화보다 규제 강화가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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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약품 연구센터. /사진제공=한미약품 |
◆바이오의약품 허가기간 단축
바이오의약품의 신속한 제품출시를 위해 품목허가신청 이후에만 우수의약품기준(GMP) 현장실태조사가 가능하던 것도 허가신청단계 이전에 실태조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뀐다. 그간 사전검토 대상에 GMP 실태조사가 포함되지 않아 제품허가신청 단계에서 현장조사를 통해 최종 적합여부를 판단함으로써 검토기간이 길어지던 것을 개선한 것이다. 식약처는 사전검토에 GMP 실태조사를 포함할 경우 시장진입기간이 최대 70일가량 단축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줄기세포치료제 개발 시 배아 사용요건이 대폭 개선되며 임상시험계획서 승인기간도 단축(67일→55일)된다.
한국바이오협회 관계자는 “바이오분야에 대한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꾸준히 해왔는데 이번에 반영돼 다행”이라며 “국내업체들이 글로벌 회사들과 경쟁하기 위해선 추가 규제 완화 등 지속적인 바이오산업 활성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보건의료단체 관계자는 "이번 규제 완화는 국민의 건강보다 제약사의 이익에 초첨이 맞춰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보건의료서비스가 자본에 종속될 경우 제 기능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3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