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금융강국으로 키우자.” 지난해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취임식에서 우리나라가 금융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퍼스트무버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금융당국 수장의 바람대로라면 금융사가 퍼스트무버로 적극 나서야 하지만 금융시장은 심심할 정도로 활기가 돌지 않는다.

금융권에선 ‘업계 최초’, ‘국내 최초’ 타이틀을 내건 금융상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 금융회사가 이목을 끄는 상품을 출시하면 다른 금융사들도 서둘러 카피상품을 내놓기 바쁘다.


유통업계에선 트렌드를 이끄는 상품이 카피되면 아류작이라는 비난을 받지만 금융업계에선 후발주자의 상품이 오히려 인기를 끄는 경우도 있다. 붕어빵처럼 비슷한 금융상품을 줄줄이 출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저성장시대 기업의 생존전략으로 꼽히는 퍼스트무버가 유독 금융권에서만 빛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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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따라 투자하는 집단동조화 영향
먼저 저성장·저금리 기조에 ‘안전제일주의’로 변해버린 금융소비자의 영향이 크다. 고객들은 금융시장에 처음 빛을 본 상품보다 다수의 고객들이 선택한 대세상품을 따라가는 추세다. 상품이 출시된 시점은 투자결정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2007년 펀드열풍이 불 당시 고객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펀드사재기에 나섰고 2008년 금융위기 직후 다시 안전성이 높은 은행상품으로 자금이 쏠렸다. 2010년에는 랩 상품에 자금이 대이동했다. 최근에는 저금리시대 재테크 상품으로 주가연계증권(ELS)에 투자자들이 몰린다.


금융상품은 일단 가입하면 일정기간 동안 목돈을 묻어두는 특성 때문에 고객이 자신의 판단보다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는 집단동조화 현상을 보인다. 주변에서 A금융상품에 가입해 수익을 냈다는 얘기를 들으면 A상품을 사들이고, 평소 거래하던 금융회사 직원이 B상품에 투자를 권유하면 B상품에 덥석 가입해버린다. 종신보험처럼 한번 가입하면 평생을 껴안고 가는 금융상품도 있어 고객은 새로운 트렌드 상품보다 오래 거래한 금융회사를 믿고 돈을 맡기는 편이다.

이런 고객을 대하는 금융사도 방어적인 경영태세를 취한다. 고객을 가장 많이 보유한 은행마저 신상품 출시에 소극적이다. 1~3월은 새해를 맞는 데다 입학식과 졸업식 등 이벤트·국경일을 기념한 신상품 출시가 많은 편인데 반해 은행들은 새 상품을 여러 개 내기보다 기존 상품에 혜택을 추가하거나 조정하는 방식으로 상품전략을 바꾸고 있다.

은행연합회 신상품 공시에 따르면 지난 1~3월 은행은 52개의 신상품을 출시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신상품 건수 76건, 2014년 90건과 비교하면 각각 24개(31%), 38개(42%) 감소했다.


삼성카드 4 V2. /사진제공=삼성카드
삼성카드 4 V2. /사진제공=삼성카드
현대카드 '제로'. /사진제공=현대카드
현대카드 '제로'. /사진제공=현대카드

◆배타적사용권 신청 저조… 당국규제 걸림돌
금융사는 신상품에 대해 독점적 판매 권한을 갖는 '배타적사용권' 획득에도 관심이 줄었다. 상품 판매를 독점할 수 있는 기간이 최소 3개월, 최대 1년에 불과해 실제 금융상품의 판매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지 의문이라는 것. 일각에선 배타적사용권 신청 시 금융상품의 세부내용이 오픈돼 후발주자의 카피상품 출시를 앞당기는 '남 좋은 일'로 전락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같은 영향 탓인지 올해 금융투자업계는 배타적사용권을 획득한 상품이 단 한건도 없다. 2012년 6건에서 지난해 2건으로 떨어졌고 올해 1건은 심사과정에서 기각됐다. 은행업계에서도 올해 배타적사용권을 획득한 상품을 찾아볼 수 없다.

카드업계는 2012년 현대카드와 삼성카드의 숫자시리즈 카드 표절소송 이후 차별화된 카드상품 출시가 한풀 꺾인 모양새다. 카드업계는 배타적사용권이 없어 당시 현대카드 제로가 삼성카드4의 표절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내용증명을 보냈으나 금융당국의 제재로 소송을 하지 않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나마 보험사들이 배타적사용권 취득에 열을 올린다. 지난해 말 금융당국이 보험사의 상품과 가격규제를 풀어주면서 보험사들이 배타적사용권을 획득해 차별적인 보험상품 판매에 적극적이다. 보험사 관계자, 학계, 유관기관, 소비자단체 위원으로 구성된 배타적사용권 심의위원회는 독창성(35점), 진보성(20점), 유용성(35점), 노력도(10점) 등으로 상품을 평가하고 80점 이상일 경우 배타적사용권을 부여한다.

손보업계에선 동부화재가 15년 만에 자동차보험의 배타적사용권을 획득해 눈길을 끌었고 생보업계에선 삼성생명의 빅플러스 연금보험이 배타적사용권 재심의를 신청해 획득이 가능할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

우리나라 금융상품은 그야말로 성숙단계에 진입했다. 예·적금을 비롯한 일반 금융상품부터 통신비, 병원비, 공과금까지 생활소비와 연계된 제휴상품들도 이미 시중에 널렸다. 차별화된 상품을 선보여도 효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완전판매와 금융소비자 피해를 우려한 금융당국의 규제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최근 금융당국은 IS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 계좌이동제서비스 등 새로운 정책금융 상품·서비스를 출시하면서 금융사들의 과당경쟁을 경계했다. 우대금리, 부가서비스 혜택으로 영업경쟁에 나설 경우 현장점검을 통해 금융사를 제재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임형석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금융사들은 차별화된 금융상품과 비즈니스모델을 찾아보기 힘들다”며 “핀테크 등 새로운 기술을 접목하고 소비자의 니즈를 만족시킬 수 있는 관점에서 상품 개발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4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