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생명보험사와 자살보험금 지급을 놓고 공방전을 벌이는 가운데 최근 연내 보험부채 시가평가를 하겠다고 통보해 생보업계가 '멘붕' 상태에 빠졌다.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도 지급해야 한다는 당국의 압박에 이어 갑작스런 LAT(부채적정성평가) 제도 개선 방안으로 당장 추가 준비금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살을 재해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던 1라운드와 소멸시효 문제 2라운드에 이어 이번엔 시가평가 시기를 놓고 금감원과 생보사의 3라운드가 시작될 조짐이다.


권순찬 금융감독원 부원장보. /사진=뉴시스 DB
권순찬 금융감독원 부원장보. /사진=뉴시스 DB

◆“연내 보험부채 시가적용” 통보
금감원은 이달 초 보험사 관계자들을 불러 ‘IFRS4(국제회계기준) 2단계 연착륙 방안’을 제시했다. 기존 LAT에 적용하는 할인율을 낮추고 올해 말부터 보험부채를 3년 안에 단계적으로 시가평가를 실시한다는 내용이 이번 방안의 골자다. 생보사들은 이달 말까지 이에 대한 종합 대응방안을 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또 금감원이 제시한 방안에 따라 당장 올해 말부터 보험부채에 대한 단계적 시가평가를 시작해야 한다. 

보험부채는 보험사가 향후 계약자에게 돌려줘야 할 보험금을 말한다. 그동안 보험사들은 계약자에게 돌려줄 보험금(준비금 혹은 보험부채)을 보험계약 당시의 예정이율(원가평가)로 책정해왔다. 하지만 올해 말부터는 현 시점의 이율로 시가평가해야 한다. 최근 저금리 기조에서 보험부채를 시가평가하면 보험사가 보장한 금리와 현재 금리 간 차이만큼 준비금이 늘어나게 된다.

시가평가할 때 중요한 잣대는 할인율이다. 금감원은 현재 LAT 제도의 할인율을 ‘20년 국고채금리+유동성 프리미엄’ 수준으로 낮출 예정이다. 현행 할인율은 자산운용수익률을 기준으로 하며 보험사별로 연 3.5~4.0% 수준이다. 이 같은 LAT 제도 할인율은 오는 2018년까지 3년간 2.5% 수준으로 낮아질 전망이다. LAT 할인율이 낮아지면 보험사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보험사의 부채는 올 연말 약 16조원, 2018년에는 35조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금감원은 지급여력비율(RBC)을 계산할 때 공시이율도 시가평가 방식으로 바꿀 계획이다. 그만큼 보험사의 자본확충 부담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금감원 관계자는 “시뮬레이션을 해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IFRS4 2단계가 시행되면 시가평가에 따라 부채는 더욱 늘어날 수 있겠다”며 “이를 감안해 2018년까지 준비금(보험계약자에게 돌려줘야 할 돈) 부족액의 70% 수준을 쌓도록 대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본확충 비상… “연내 도입은 압박용” 볼멘소리


그동안 2020년 시행을 기준으로 회계제도 관련 변화를 준비하던 보험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2020년이 아니라 당장 올해부터 LAT 제도 할인율 하락에 따른 자본 확충 부담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보험사는 보험부채를 자사의 자산운용수익률 기준으로 준비해왔다. 가령 10년 후 계약자에게 연 7% 수익률을 약정한 상품을 판매한 보험사의 경우 자산운용수익률(4% 가정)을 기준으로 3% 정도의 준비금을 쌓는 식이다.

그런데 최근 금감원이 LAT 할인율을 단계적으로 낮추겠다고 발표하면서 보험사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특히 90년대에 고금리 상품을 대거 판매한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농협생명 등 대형 생보사들의 경우 3년간 추가로 재무제표에 기재해야 할 보험부채만 20조원 정도가 늘어날 전망이다.

3년간 할인율이 0.5%포인트 낮아진다고 가정할 때 삼성생명만 약 9조8000억원의 부채가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한화생명은 5조4000억원, 농협생명 4조2000억원, 교보생명 2조3000억원 등으로 예측된다.

업계 일각에서는 금감원이 자살보험금 지급을 재촉하기 위해 ‘연내 부채 시가평가 시행’이라는 또 다른 압박카드를 꺼내든 게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생보사 한 관계자는 “IFRS4 2단계 도입에 대응하기 위해 LAT 제도를 개선한다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사전예고도 없이 ‘연내 도입’이라는 통보는 솔직히 보험사 입장에서 압박용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당국의 권고에도 대형보험사들이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 지급 문제에 대해 대법원 판결까지 유보하겠다며 버티는 상황에 금감원이 IFRS4 2단계 도입 준비를 명분으로 연내 시가평가 적용을 통보한 것은 사실상 우회적 초강수가 아닌가 싶다”며 “LAT 제도 변경으로 시가평가가 시행되면 자본확충 부담을 가장 많이 떠안게 될 곳도 삼성, 한화, 교보 등 대형생보사들이라 연관성이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다”고 귀띔했다.

금감원은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LAT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당국뿐 아니라 보험업계에서도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며 “2020년에 급작스레 회계기준이 변경되면 업계가 재무 절벽에 부딪히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어 제도적으로 시가평가를 유도하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IFRS4 2단계 도입 전 순차적 자본 확충을 통해 적정 금액을 쌓아두자는 취지”라며 “자살보험금 이슈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일축했다.

◆금리인하로 저축성보험도 ‘골머리’

게다가 지난 9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치인 연 1.25%로 결정하면서 생보업계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과거에 팔아놓은 확정형 고금리 상품뿐 아니라 현재 팔고 있는 저축성보험도 생보사들의 발목을 잡아서다.

생명보험협회에 따르면 보험사들이 판매하는 저축성보험 상품 중 40%가량이 최저보증이율을 제공한다. 기본적으로 금리연동형 상품이지만 최저보증이율 이상의 금리를 주겠다고 약속한 상품들이다. 대부분 1.5~2%대의 최저보증이율을 제시한다. 일부 보험사에선 최근까지 3% 이상을 보장하는 최저보증이율 상품을 판매한 것으로 파악돼 심각한 골칫거리다.  

따라서 저축성보험 계약이 많은 보험사의 경우 책임준비금 확보가 시급한 상태다. IFRS4 2단계 적용 시 저축성보험료를 전액 매출로 합산하는 현행 기준과 달리 은행 예·적금과 같이 부채로 평가돼 준비해야 할 금액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생보업계 한 관계자는 “자살보험금 지급에 추가적 자본확충 부담까지 안고 있는 상황인 데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로 다른 부분에서 수익을 내는 것조차 어려워졌다”며 “무엇보다 저축성보험 위주로 영업한 보험사들은 자본잠식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
www.moneyweek.co.kr) 제44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