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아이팩(IIPAC) 회장(67)이 하버드 로스쿨에 다닐 때 이야기다. 로스쿨 건물로 가려면 차가 잘 다니지 않는 6차선 도로를 지나야 하는데 횡단보도가 멀리 있었다. 어느날 선배들이 이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것을 발견한 그는 선배들에게 “변호사가 이렇게 가볍게 법규를 어겨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 선배들은 “로스코 파운드도 이렇게 다녔다”고 말했다. 파운드는 하버드 로스쿨에서 20여년간 학장을 역임한 존경받는 법학자다.

그럼에도 당시 김 회장은 선배들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무단횡단은 어느 상황에서든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들이 그렇게 말한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고 말한다. 물론 무단횡단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겪은 수많은 기업분쟁을 통해 모든 것을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볼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김철호 아이팩조정중재센터 회장. /사진=최윤신 기자
김철호 아이팩조정중재센터 회장. /사진=최윤신 기자

◆ 분쟁해결, 소송이 능사 아니다
서울 종로구 서울글로벌센터빌딩에 입주한 사단법인 아이팩조정중재센터(IIPAC) 사무실에서 김철호 회장을 만났다. 김 회장은 “이 세상에 완벽한 정의는 없다”며 “소송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분쟁해결의 능사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기업 특허분쟁 등 사적인 분쟁이 발생할 때 다른 해결방안을 시도하지 않고 소송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 절차 때문에 결과적으로 양측이 모두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도하게 드는 시간과 비용 때문이다.

김 회장은 “우리 사회는 모든 분쟁을 소송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소모적인 소송이 아닌 다른 대안적 해결방안(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소송을 통해 재판을 받으면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를 가릴 수 있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는 모두가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한다. 1심 판결을 인정한다면 그나마 낫지만 만약 3심까지 가면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까지 5년정도가 걸리는데 이렇게 걸리는 시간과 그동안 들어가는 변호사 수임료 등의 지출이 과도하다는 것.


소송에서 이겨 보상금을 받더라도 변호사에게 성공사례금 등을 지불하고 나면 오히려 마이너스인 상황이 많다. 재판과정에서 받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고려하면 재산권 침해 등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을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업간의 분쟁에서 막대한 소송비용을 감당할 방법이 없는 중소기업들은 분쟁해결 자체를 포기해버리기 일쑤다.

김 회장은 “소송의 이런 부담 때문에 중재(arbitration)나 조정(mediation) 등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분쟁해결 방법이 적극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재와 조정은 제3자가 분쟁 당사자 사이에서 화해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중재·조정의 가장 큰 강점은 시간절약이다. 길어야 몇달 사이에 과정이 마무리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3심까지 변호사를 수임할 필요가 없어 비용도 절감한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은 법적 분쟁 해결을 위해 이를 적극 도입한다. 미국의 경우 현재 모든 분쟁의 약 70%가 조정을 통해 해결하며 29%는 중재돼 소송까지 가는 경우는 단 1%수준에 그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조정과 중재의 차이점은 중재자의 결정에 대한 거부권의 유무에 있다. 중재는 제3자인 중재인을 선임해 그 분쟁을 중재인에게 판단을 맡기고 양 당사자가 절대복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반면, 조정은 전문가와 함께 대면해 당사자 간 원만한 화해를 유도하는 방법이다.

김 회장은 중재와 조정 등의 대안적 방법은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것에 더해 새로운 가치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소송의 경우 양 당사자의 관계를 단절시키지만 조정이나 중재를 이용하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특히 조정의 경우 청구취지에 대한 제한이 없어 더 넓은 범위에서 서로가 정말 원하는 것을 놓고 협상할 수 있다. 또 소송과 달리 기밀 등이 유출될 우려가 없다.

인터뷰에 동석한 특허청 오성환 변호사(특허청 심사관)는 “현재 소송이 과도하게 벌어져 대법관 한명이 한해 200건이 넘는 분쟁을 해결하는 상황이어서 중요한 판결이 더욱 늦어지는 경우가 있다”며 “조정·중재가 활성화된다면 꼭 필요한 소송의 질이 더 높아지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 조정이 기업 생태계 살린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에서 이런 대안적 분쟁해결 방법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것에 우려를 나타냈다. 글로벌 특허분쟁이 갈수록 많아지는 상황에서 현재와 같은 소송일변도의 상황이 이어질 경우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특히 최근 늘어나는 특허분쟁에서 소송은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제품의 생애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상황에서 판결이 나올 때쯤이면 해당 제품은 시장에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그는 “삼성과 애플이 미국에서 철지난 아이폰4의 특허침해를 놓고 싸우는 것은 양 측의 브랜드 자존심을 건 소모전이지 시장상황과는 거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중소기업 생태계에도 특허소송의 대안이 절실하다. 자금력이 약한 중소기업은 특허침해 소송으로 인해 생산제품 판매가 6개월만 정지되면 도산한다. 특허를 침해당한 쪽에선 특허무효소송에 휩쓸리면 망한다. 중재와 조정으로 대안을 마련한다면 양측이 상생할 수 있다.

그는 “우리나라를 동북아 특허허브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나오는데 대부분의 특허분쟁을 소송으로 해결하는 상황에서 이는 어렵다”며 “소송으로 가면 특허무효화율이 70%에 달하는데 누가 우리나라에서 특허를 받으려 하겠냐”고 말했다.

김 회장이 아이팩조정중재센터를 설립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아이팩은 미국 뉴 스쿨(The New School)의 총장 데이빗 반 잔트(David Van Zandt)를 이사장으로 2014년 2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정식으로 설립했고, 같은 해 9월에는 한국 특허청에서 조정 및 중재 기관으로 정식 허가를 받았다. 

그는 “대한상공회의소 산하에 설립된 대한상사중재원에서 중재업무를 하지만 조정을 다루는 기관은 전무했다”며 “아이팩에서는 조정의 저변 인구 확산을 위해 분야별로 경험이 풍부한 조정·중재인 인력풀을 늘리기 위한 교육 과정을 실시 중”이라고 말했다. 국회산하에 별도의 조정센터를 만들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

그는 “우리사회에 공동체정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컸다”며 “전체가 풍요롭게 사는 접근법으로 조정 확산에 힘쓰겠다”고 다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6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