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당시부터 ‘재벌개혁’을 주창한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면서 재계가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다. 새정부 출범 직후부터 경제 요직에 속속 합류한 '재벌저격수'들이 예고한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이 어떻게 이뤄질 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여러 기업집단 중 가장 관심받는 곳은 현대자동차그룹이다. 총수일가의 지배력이 순환출자 구조에서 기인하는 탓이다. 현대차그룹은 순환출자고리 해소와 함께 정의선 부회장의 승계를 위한 그림도 그려야 하는 상황이다.
◆ 거세지는 순환출자 해소 압박
“순환출자가 재벌그룹 총수일가의 지배권을 유지·승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그룹은 현대차그룹 하나만 남았다.”
문재인정부의 첫 공정거래위원장으로 내정된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내정인사가 발표된 다음날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재계 검찰’로 통하는 공정위의 수장 내정자가 직접적으로 현대차그룹의 순환출자 구조를 언급한 것은 쉽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4대그룹 사안은 좀 더 엄격한 기준으로 평가해 시장질서를 효과적으로 바로잡겠다는 그의 취임일성과 맞물려 강한 추진동력이 발생할 것이란 게 재계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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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시스 김훈기 기자 |
여기에 지난 25일 재벌저격수로 불리는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임명되며 범정부 차원의 재벌개혁에 더욱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는 “두 사람 모두 ‘재계 저승사자’로 불리는 개혁론자지만 경제당국 책임자로서 부작용을 우려해 점진적인 변화를 유도할 수도 있다”면서도 “현대차그룹의 순환출자해소 만큼은 상징적 의미에서 강하게 추진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이미 국회에선 기존의 순환출자고리 해소를 의무화하는 법안들이 발의됐다. 재벌개혁을 주장하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의석수를 합치면 국회의석수의 과반이 넘는데다 새정부의 정책방향과 부합하다보니 법안 가결은 시간문제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정의선 부회장의 승계를 위해서도 지배구조에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현대차그룹은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해 함구 중이다. 지난 19일 공시를 통해 지주회사 전환 추진설에 대해 부인한 것 외에는 공식적인 언급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재계 관계자는 “공식적인 언급은 없지만 현대차그룹 대관업무 담당자들이 정치권의 움직임과 관련 법안의 처리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 지배구조 개편, 인적분할·글로비스 활용이 핵심
현대차그룹은 크게 3가지 순환출자고리를 가지고 있지만 지배구조의 핵심은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연결되는 고리다. 현대모비스는 현대차 지분 20.8%, 현대차는 기아차 지분 33.9%, 기아차는 현대모비스 지분 16.9%를 보유하는 등 핵심 계열사들이 순환출자고리로 단단히 묶여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차 지분 5.17%와 현대모비스 지분 6.96%를, 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은 현대차 지분 2.28%와 기아차 지분 1.70%를 각각 보유 중이다.
순환출자고리 해소를 위한 시나리오는 무수히 많지만 정의선 부회장의 승계와 전환비용 등을 고려했을 때 많게는 5가지 경우의 수가 나온다. 증권가에서 가장 유력하다고 여기는 건 현대차와 기아차, 모비스 3개 회사를 각각 투자부문과 사업부문으로 인적 분할한 뒤 3개 회사의 투자부문을 합병해 지주회사를 설립하는 방법이다. 롯데그룹이 추진 중인 지주사전환과 유사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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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웅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3사 중 한 회사, 특히 정 부회장이 많은 지분을 가진 기아차를 분할해 지주사를 만드는 시나리오도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비용 문제가 걸림돌이 될 것”이라며 “3사 분할·합병의 경우 다른 시나리오에 비해 비용이 현저하게 낮아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3사통합홀딩스에 현대글로비스를 합병하거나 정의선 부회장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지주회사에 현물 출자해 지배권을 강화하는 것이 그 다음 절차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다른 시나리오는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합병이다. 정 부회장의 자산가치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현대글로비스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유 연구원은 “이 경우 현대제철, 기아차, 현대차가 보유한 합병회사의 지분매입에 5조9000억원이 필요하지만 일부를 합병법인이 직접 매입할 경우 정 부회장의 추가지분매입 부담이 적어진다”고 설명했다.
이런 시나리오에 또 다른 변수가 개입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더 포기해야 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김 공정위원장 내정자는 지난 24일 대기업 총수일가의 부당한 계열사 일감몰아주기에 제재대상도 확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일감몰아주기 제재기준이 되는 상장사 지분율 요건을 기존 30%에서 20%로 낮추겠다는 것. 이미 이런 내용이 포함된 상법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된 상태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정 부회장은 경영승계의 핵심인 현대글로비스 지분(23.29%)을 더 줄여야 한다.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을 서둘러야 할 이유다. 앞서 정 회장 부자는 2015년 2월 현대글로비스 주식 13.39%를 매각해 29.99%로 비중을 낮춰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피했다. 내부거래 비중이 70%에 육박하는 현대글로비스가 다른 회사의 일감을 채워 규제를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재계 관계자는 “시간을 끌수록 지배구조 개편의 제약은 점점 늘어날 것”이라며 “정 부회장이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머지 않아 그룹지배구조 전환 움직임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9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