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씨(35·남)는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에 위치한 한 게임업체에서 근무하는 게임물리엔진 개발자다. 그는 최근 개발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매일 야근을 반복했음에도 수령한 급여는 몇달 전과 큰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됐다. A씨는 “포괄임금제 적용 대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개발 중인 게임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최근 정부가 장시간 근로를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아온 포괄임금제를 법으로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정부는 포괄임금제를 금지하는 이유로 “근로시간 단축과 소득증대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함”이라며 “포괄임금제가 정당한 근로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문제를 야기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밝혔다.


◆게임업계 '임금 후려치기' 제동

포괄임금제는 실제 근로시간을 측정하지 않고 매월 일정한 금액의 시간외 근로수당을 기본임금에 포함시켜 지급하는 임금체계를 말한다. 예컨대 근로계약서에 40시간 초과근무 수당을 포함한 후 60시간을 초과 근무하면 20시간에 대한 보상은 받을 수 없다. 이 제도는 근로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일일이 측정하기 어려운 일부 서비스업종을 중심으로 도입됐으나 지금은 전체 사업장의 40%가량이 도입, 시행 중이다.

게임업계도 포괄임금제가 적용되는 주요 산업군으로 분류된다. 게임업계 종사자들은 개발과 서비스 모든 부문에서 여타 산업보다 초과근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게임 출시가 임박했을 때 적용되는 초장시간 근무인 ‘크런치모드’가 악명 높다. 크런치모드가 시작되면 개발자들은 개인시간·수면·영양섭취·위생 등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반납한 채 평균 2개월가량을 사무실에서 보낸다.

게임 개발이 완료돼도 각종 업데이트와 서버유지 및 보수를 위한 초과근무가 계속된다. 게임업계 한 종사자는 “게임 생명이 갈수록 짧아지면서 하나의 게임 개발이 끝나면 곧바로 다른 게임의 개발에 투입되는 것이 현실”이라며 “게임을 개발하면서 초과근무를 해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지 못해 노동강도 대비 경제적 고충이 크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정의당 IT노동상담센터와 게임개발자연대가 발표한 ‘2017 게임산업종사자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게임업계 종사자 가운데 84.2%가 크런치모드를 경험했으며 1년 중 평균 70일을 야근과 밤샘근무 등 집중근무를 했고 하루 평균 14.4시간 근무했다. 그 가운데 우울증 진단을 받은 응답자도 16.8%에 달했다. 그럼에도 임금은 원도급이 월 400만원 수준인데 반해 하도급업체들은 원도급의 50% 수준인 평균 200만원가량에 불과했다. 

포괄임금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지난 6월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100대 국정과제에 포괄임금제 금지를 포함하면서부터다. 근로시간을 측정하기 어려운 일부 직종을 제외한 모든 직종에서 원칙적으로 포괄임금제를 금지하고 포괄임금제를 적용할 수 있는 직종이더라도 ‘임금 후려치기’ 식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엄벌한다는 방침이다.

지난 16일 임명된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도 같은 입장이다. 김 장관은 후보자 시절 국회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시간외 근로수당을 급여에 포함시키는 포괄임금제를 법으로 금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김영주 고용노동부장관. /사진=뉴스1 DB
김영주 고용노동부장관. /사진=뉴스1 DB

◆"금지 환영" vs "성급하다"

이런 정부의 움직임에 게임업계 종사자들은 환영의 뜻을 보였다. 비상식적인 근무환경으로 인한 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지난해 국내 한 게임업체에서는 돌연사와 투신자살로 3명의 직원이 목숨을 잃었다. 게임업계 한 관계자는 “이번 조치로 일한 만큼 받고 인간답게 살 권리가 주어지길 희망한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반면 근로환경 개선이라는 목표에는 공감하지만 포괄임금제를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 다소 성급하다는 의견도 있다.

업계 종사자 일부는 포괄임금제 폐지와 관련한 정부의 입장 발표에 대해 “공공연히 떠돌던 이야기가 이슈화된 것일 뿐 근본적인 작업환경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할 것”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양한 편법으로 법망을 피해가는 업체가 허다한 상황에서 정부가 추진 중인 자율적인 근로환경 개선은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또 모바일게임의 경우 게임 배급을 담당하는 퍼블리셔와 출시일이 정해져 있어 포괄임금제 없이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고용노동부가 포괄임금제 금지로 자율적인 근무환경 개선을 유도하고 대형 게임업체들도 이를 수용하겠다고 밝힌 만큼 초반에는 어느 정도 개선된 모습을 보일 것”이라며 “하지만 게임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이 아니라 콘텐츠를 창작하는 것이어서 융통성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게임업계 내부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전문가들은 포괄임금제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재와 같은 가학적인 형태가 아니라 사회통념상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김규은 공인노무사는 “현재 게임업계는 연봉에 고정시간외수당을 포함해 지급하는 포괄연봉 임금체계가 만연한 상황”이라며 “연봉에 시간외근로에 대한 보상이 포함됐다는 점 때문에 근로자는 당연하게 시간외근로를 요구받고 심지어 연봉에 포함된 연장근로시간을 초과해 근로를 제공하더라도 추가수당이 지급되지 않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법정근로시간을 기준으로 기본 임금을 책정하고 시간외근로 발생시마다 제수당을 적법하게 산정해 지급한다면 불필요한 연장근로가 줄고 업무집중도가 향상돼 장기적으로 기업의 이익을 창출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2호(2017년 8월23~2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