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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조직에 日정부 개입. 지난 2월28일 경기 안양시 평촌중앙공원에서 한 어머니와 여학생이 평화의 소녀상을 닦아 주고 있다. /사진=뉴시스 |
일본군 위안부 조직과 동원 과정에 일본 정부가 개입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장인 호사카 유지 교수는 19일 서울 광진구 세종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언급했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아시아여성기금이 1997년 출판한 '종군위안부 관계자료집성' 5권 중 3권을 번역·분석한 중간 보고 성격의 내용을 발표했다. 이 자료집은 한국에서는 호사카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정식 번역됐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 정부의 각 부처는 당시 위안부를 조직하고 동원하는 과정에 하나의 시스템으로 포함됐다"며 "따라서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위안소의 본격적인 설치는 1937년 중일전쟁이 계기로 작용했다. 당시 전쟁이 어느 정도 소강 상태에 접어들며 중국 창부들과 성관계를 가진 중국 현지 일본 병사들의 성병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난징대학살 등을 통해 일본 병사들의 현지 민간인 여성 강간 사건이 많아지면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위안소가 본격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호사카 교수는 위안소 설치 등 위안부 조직은 당시 일왕 직속부대인 황군의 독자적인 결정이라며 "당시는 5·15사건(1932년) 등 일본군이 총리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일본군에 대한 공포감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일본 정부가 위안소 설치 등에 대한 일본군의 결정을 거역할 수 없었던 배경이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인하는 위안부 문제 해법의 열쇠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소 설치는 일본군 중에서도 가장 힘이 강했던 육군의 독자적인 결정이라며 위안부 모집 초창기였던 1937~1938년 부녀자 유괴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업자들과 관련한 경찰 내부 문서를 증거로 제시했다. 위안부 동원과 관련해 업자들이 군의 허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경찰은 업자를 체포했지만, 뒤늦게 각종 공문서 등을 통해 '업자들이 일본군의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는 것.
호사카 교수는 "처음에는 일본 정부와 군이 별도로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경찰이 이들을 부녀자 유괴 혐의로 체포한 만큼 당시 위안부 모집이 유괴에 가까울 정도로 강제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현지 일본군이 위안부 동원을 결정하고 일본 외무성 총영사관에 협조를 요청하면 일본 총영사관이 일본 내 각 정부 기관(내무성)에 업자들에 대한 편의 제공을 의뢰하는 방식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를 근거로 일본 내 각 정부 기관들이 업자에게 편의를 제공했다며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호사카 교수는 이처럼 비공식적으로 허가된 위안부 모집은 1938년 내무성 등 일본 정부의 공식 허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운영됐다며, 경찰청 문서 등을 근거로 1938년 2월18일 내무성 경보국장이 위안부 동원을 공식적으로 허가하면서 업자들에 대한 편의 제공 등을 명령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부녀들의 모집과 주선 업자에 대한 단속이 적절하지 못하면 제국의 위신에 상처를 입히고… 부녀 매매에 관한 국제 조약의 취지와 어긋나지 않기를…' 등이라고 언급하며 국제사회에서의 일본 정부 입장을 고려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 정부는 이 내용을 근거로 일본 정부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호사카 교수는 특히 군의 증명서를 가진 업자들의 모집 과정에서 취업 사기가 만연했고, 군함에 위안부로 동원되는 이들을 태워 항구에 도착하는 즉시 위안소로 이동하게 하는 등 군함에 탄 순간부터 강제 연행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합법을 위장한 불법 방치로 21세 이상, 보호자의 허가가 있어야만 동원이 가능하다는 조항은 사실상 유명무실했다며 "업자들에게는 군의 허가서와 재외 공관의 증명서만 있으면 무조건 편의가 제공됐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내용은 위안부로 동원된 일본 내 한국인, 대만인 등에서 심각하게 벌어졌기 때문에 당시 식민지였던 한국 등에서는 더욱 심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호사카 교수는 "위안부 동원 과정에서 무관실과 헌병대, 영사관 등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용했다"며 "일본 정부의 각 부처는 위안부를 조직하고 동원하는 과정에서 업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등 시스템의 일부였기 때문에 법적인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제는 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에서도 일본 정부 각 부처의 역할이 언급돼 있지 않다는 점"이라며 "지금까지는 군의 관여와 강제성, 업자 등에 대해서만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책임과 관련한 관심이 덜했다"고 설명했다.
호사카 교수는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당시 일본 정부가 발표한 내용에 대해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며 "일본 정부는 구 일본군에 대한 편의 제공자, 위안부 생산 시스템에 포함된 공범으로서 법적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연구 결과는 세종대가 후원하고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가 분석한 것으로 '종군위안부 관계 자료 집성' 자료 수집자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와 협력해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