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월 16일 향년 27세에 윤동주 시인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학생이 액자 속 윤동주 시인을 바라보는 모습. /사진=뉴스1
1945년 2월 16일 향년 27세에 윤동주 시인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학생이 액자 속 윤동주 시인을 바라보는 모습. /사진=뉴스1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1945년 2월16일. 광복을 6개월 앞두고 윤동주 시인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향년 27세였다.


사인은 뇌일혈. 혈기왕성한 20대가 높은 혈압으로 뇌혈관의 약한 부분이 터져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 일은 흔치 않았다. '윤동주 사망. 시체를 찾아가시오'라는 사망 전보를 받은 윤동주의 아버지와 당숙은 곧바로 후쿠오카 형무소를 찾아갔다. 그곳에서는 50명의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들이 복도에 줄지어 서 있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같이 수감 중이던 윤동주의 고종사촌 송몽규는 "동주와 나는 계속 주사를 맞고 있는데 어떤 주사인지는 모른다"는 말을 전한 후 한달도 채 되지 않아 사망했다. 이들 외에도 주사를 맞은 생체 실험 대상자 18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맞은 주사의 정체는 바닷물이었다. 2000년대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해제 문서 중 1948년 일본전범 재판 관련 문서에는 규슈제국 대학이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대체 혈액 실험의 일환인 혈장 대체용 생리 식염수를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진행했다는 증언이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생리 식염수 대신 해수를 주입했다. 뇌일혈이라는 사인은 해수 속 세균 감염의 증상과 비슷했다. 생체실험 대상자는 대부분 전쟁 포로와 독립 운동가들이었다.

불태워 없어질 뻔한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

2013년 2월27일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유고·유품 기증 특별전서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본이 전시된 모습. /사진=뉴스1
2013년 2월27일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유고·유품 기증 특별전서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본이 전시된 모습. /사진=뉴스1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은 그가 죽은 뒤 1948년이 돼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친구 정병욱과 윤동주 시인이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이 시집은 총 31편의 시가 수록됐다.

이 중 19편의 시는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1년 집필한 '육필원고'의 일부다. 서시 또한 그 시기에 집필됐다. 직접 원고지를 엮어 3부를 만든 윤동주 시인은 1부는 자기 자신에게, 다른 1부는 본인의 스승, 마지막 1부는 대학교 후배이자 가장 가까웃 벗인 정병욱에게 전했다.

1941년 12월8일 일본은 하와이에 있는 미군기지 진주만을 습격하고 같은 날 괌·홍콩·필리핀 등 동남아시아를 상대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일본을 중심으로 영국·프랑스·미국·소련 등 연합국이 참여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군인, 무기 등 전쟁 물자가 필요해진 일본은 조선인 20만명(최저 추정치)을 강제로 징병하는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했다.

일본군 징집영장을 받은 정병욱은 전쟁 병사로 끌려가기 전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 윤동주 시인의 육필 원고를 건넸다. 그는 어머니에게 "저나 동주형이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간수해달라"며 "절대 일본 순사들 눈에 띄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이는 단지 '한글'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가장 거센 통제와 핍박을 받던 1938~1945년 일제 식민 통치 말기에는 우리말이 금지됐기 때문. 한글로 쓰여진 문서는 불온문서와 다름없어 들통 나면 소각당하기 일쑤였다.

두 사람이 필사적으로 지켜낸 원고는 마침내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처음 나왔다. 윤동주의 뿌리 깊은 고향 상실 의식과 죽음에 대한 강박 관념이 담긴 31편의 작품은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서시, 별 헤는 밤, 참회록, 자화상, 쉽게 쓰여진 시 등 그의 아름다운 작품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의 사랑을 받고 있다.

77년만에 되찾은 한국인의 국적… 윤동주 시인

2022년 7월11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국가보훈처 외벽에 걸린 현수막의 모습. /사진=뉴스1
2022년 7월11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국가보훈처 외벽에 걸린 현수막의 모습. /사진=뉴스1

한국인임에도 직계 가족이 없는 탓에 호적(현 가족관계등록부)을 갖지 못한 윤동주 시인 등 무호적 독립유공자 156명이 2022년 8월9일 서류상 대한민국 국민이 됐다. 등록기준지는 충남 천안시에 위치한 '독립기념관로 1'로 부여했다. 윤동주 시인이 서거한지 77년만이었다.

1948년 12월 국적법이 제정된 이후에야 조선인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질 수 있던 탓에 광복 이전에 숨진 윤동주 시인은 대한민국 공적 서류상 호적을 한번도 갖지 못했다. 중국의 한 포털 사이트는 윤동주 시인의 국적을 중국, 민족을 조선족이라고 표기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윤동주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77년만에 우리 곁에 돌아왔다. 일제강점기 시대 총과 칼로 맞서 싸운 것만이 독립운동인 것은 아니다. 직접 맞서 싸우지 않았더라도 문학과 글로 치열하게 싸운 윤동주 시인의 투쟁이 역사 속 우리 곁에 영원히 남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