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들과 맥주를 마시며 즐기는 새로운 연극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은 맥주를 들고 있는 배우들의 모습. /사진=극단 하땅세 제공
관객들과 맥주를 마시며 즐기는 새로운 연극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은 맥주를 들고 있는 배우들의 모습. /사진=극단 하땅세 제공

"맥주 한 입 하고 시작합시다"

배우들이 관객과 함께 맥주를 마시는 연극이 인기다. 바로 극단 하땅세가 진행하는 '그때, 변홍례'다. 이 연극은 예매하면 맥주 등 마실 것을 챙겨오라고 공지한다. 이 극장을 지난 16일 밤에 방문했다.


입장 시간이 다가오자 지하 1층 공연장에서 배우들이 힘차게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극장 입구에서 고소한 냄새도 나기 시작했다. 들어가 보니 무대에서 배우들이 프라이팬에 버터와 옥수수를 넣고 직접 팝콘을 튀기고 있었다.
'그때, 변홍례' 공연을 준비 중인 배우들이 관객들을 위한 팝콘을 직접 튀겼다. 사진은 팝콘을 만들고 있는 배우들, 음료를 싸온 관객들이 팝콘을 챙긴 모습, 그리고 '그때, 변홍례' 포스터. /사진=김서현 기자
'그때, 변홍례' 공연을 준비 중인 배우들이 관객들을 위한 팝콘을 직접 튀겼다. 사진은 팝콘을 만들고 있는 배우들, 음료를 싸온 관객들이 팝콘을 챙긴 모습, 그리고 '그때, 변홍례' 포스터. /사진=김서현 기자

관객들이 착석하자 배우들은 "팝콘 드실 분 손 들어 달라" "마실 거 챙겨 오셨냐"며 팝콘을 나눠줬다. 또 "기다리느라 심심하신 분들은 팝콘을 튀기고 있는 배우 사진 찍는 것을 허용해 드리겠다"며 분위기를 띄웠다.

총면적 30평 남짓한 공연장에 꽉 찬 50여개 좌석이 관객들로 빼곡했다. 등받이가 없는 맨 앞줄 바닥 좌석까지도 관객이 들어찼다.

한 배우가 "우리들의 주말을 위하여"라며 선창하자 관객과 배우 모두 건배했다. 관객은 물론 배우들도 캔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이렇게 공연이 시작됐다.

"맥주 마시는 시간입니다"… 음료·조명·소리로 유쾌한 연출

'그때, 변홍례'는 작은 무대 위에서 소리, 조명 등 다양한 장치를 활용해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사진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배우들의 모습. /사진=극단 하땅세 제공
'그때, 변홍례'는 작은 무대 위에서 소리, 조명 등 다양한 장치를 활용해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사진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배우들의 모습. /사진=극단 하땅세 제공

'그때, 변홍례'는 1931년 7월31일 한 신문에 실렸던 '변홍례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극은 변홍례를 죽인 범인을 찾는 이야기다. 일본인처럼 대우받고 싶어 하는 조선인 고녀(고용된 여자) 변홍례는 어느 날 철도회사 사장 사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다. 그 과정에서 일본 철도회사를 운영하는 사장과 그의 부인, 직원, 형사와 펼쳐지는 얘기다.


이 작품은 작은 공간 안에서도 빛과 조명, 소리, 지형지물 그리고 빔프로젝터를 통한 영상 송출 기능까지 재치 있게 사용해 연출했다. 좁은 무대 위에서도 추격신, 추락하는 장면 등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만큼 그 당시 유행이었던 무성 영화의 기법을 반영했다. 등장인물의 대사를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닌 다른 배우가 말한다.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만 타이밍에 맞게 연기한다. 마치 외국 영화를 '더빙'하듯이 말이다.

사전에 녹음한 음향보다 배우들이 무대 위 마이크에서 내는 소리가 더 많이 사용된다. 누군가를 때릴 때 배추를 주걱으로 때려 실감 나는 소리를 냈다. 물소리와 발소리는 직접 마이크에 대고 물을 따르거나 구두를 부딪쳐 현장감을 나타냈다. 이를 위해 모든 배우들이 다 맨발로 연기했다.
작은 무대 위에서도 조명, 소리 등 연출로 관객에게 편안하고 새로운 '연극 에티켓 문화'를 선사했다. 사진은 관객에게 3분의 맥주 마실 시간을 주고 음식을 먹는 마임을 하고 있는 배우들과 그들을 찍고 있는 관객들의 모습. /사진=김서현 기자
작은 무대 위에서도 조명, 소리 등 연출로 관객에게 편안하고 새로운 '연극 에티켓 문화'를 선사했다. 사진은 관객에게 3분의 맥주 마실 시간을 주고 음식을 먹는 마임을 하고 있는 배우들과 그들을 찍고 있는 관객들의 모습. /사진=김서현 기자

극 중간에 관객들이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극 중 인물들이 다 같이 식사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타이머로 3분을 설정했다. 그러더니 "여러분 맥주 마시는 시간입니다"라며 3분 내내 조용히 앉아 밥 먹는 마임을 했다. 그동안 관객들은 담소를 나누며 가져온 음료를 마셨다.

하녀 변홍례가 갑자기 보란 듯이 타이머를 뒤집어 보이니 '사진 촬영 가능'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리며 사진을 찍고 여유를 즐겼다. 사장 부인이 "왜 너만 먹니 홍례야. 좀 나눠줘라"고 하자 변홍례가 팝콘을 더 나눠주기도 했다.

작은 공간에서 펼치는 '재기발랄함'…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관객들

새로운 연극 문화를 접한 관객들은 "재기발랄" "유쾌" 등의 표현으로 연극을 표현했다. 사진은 연극을 마치며 관객들과 건배하고 맥주를 마시고 있는 배우들의 모습. /사진=김서현 기자
새로운 연극 문화를 접한 관객들은 "재기발랄" "유쾌" 등의 표현으로 연극을 표현했다. 사진은 연극을 마치며 관객들과 건배하고 맥주를 마시고 있는 배우들의 모습. /사진=김서현 기자

"다시 한번 건배합시다"

연극이 시작할 때처럼 배우와 관객들이 다시 건배하며 극이 마쳤다. 관객들은 배우들과 사진을 찍고 웃으며 짐을 챙겼다. 살인사건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극이었음에도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직장 동료와 함께 공연장을 찾은 30대 노슬아씨는 "이 연극을 단어로 표현하면 '재기발랄함'인 것 같다. 보는 내내 재치 있고 유쾌한 연출에 눈을 뗄 수 없었다"고 후기를 남겼다. 혼자 연극을 관람하러 온 A씨는 "친구가 39만원 내고 본 공연보다 이 연극이 더 재밌다고 추천했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딸과 함께 연극을 본 40대 최씨는 "최근에 집중력이 나빠져 뭔가를 집중해서 본 적이 손에 꼽는다. 그런데 오랜만에 집중해서 본 것 같다. 중간 중간에 쉴 시간도 있어서 더 좋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해당 연극은 인터파크 예매 창에서 관객 평점 9.9점을 받았다. 인터파크 63개의 후기 중 단 두 개의 후기만이 별 4개를 매겼다. 나머지는 모두 만점인 별 5개다. 별 4개의 점수를 매긴 작성자는 "작은 공간에서 보여주는 맥시멀리즘의 미학"이라면서도 "형식과 미학의 탁월함에 비해 작품의 서사나 메시지가 빈약하다는 것에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평가했다.

"생에 처음 연극보기 운동"… 연극의 '대중화'를 위해

극단 하땅세는 유쾌하고 즐거운 연극문화를 통해 연극이 더 대중화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사진은 연극이 끝나고 난 후 관객들과 건배를 하고 있는 배우들의 모습. /사진=김서현 기자
극단 하땅세는 유쾌하고 즐거운 연극문화를 통해 연극이 더 대중화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사진은 연극이 끝나고 난 후 관객들과 건배를 하고 있는 배우들의 모습. /사진=김서현 기자

철도회사 사원 역을 맡은 김승태 배우는 하땅세 극단이 "영국 에든버러에서 열린 한 예술 축제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해당 축제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극이 열렸는데 거의 모든 극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에 맥주와 함께 즐기는 연극을 기획했다. 그는 "연극이라는 게 관객과의 호흡이 중요한 부분이다. 관객과 건배하고 (맥주를) 마시면 호흡을 맞추기 수월해진다. 다른 연극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느낌을 받는다"고 소감을 전했다.

변홍례 역의 김채연 배우는 "사실 연극이라는 장르가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보는 마니아적인 부분이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사람이 보도록 대중적인 연극을 만들고 싶다"고 표현했다. 이어 "2018년 초연 때보다 코미디 요소를 더 넣어 재창작했다"며 "대중적인 극을 만들어 연극의 고정관념을 깨고 싶다"고 덧붙였다.

1월부터 맥주와 함께 극을 채우기 시작한 '그때, 변홍례'는 모든 좌석이 매진되고 있다. 김채연 배우는 "우리는 계속 도전 중"이라며 발전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김승태 배우는 "일종의 '연극 보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연극을 (태어나서)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무료다. 전화해서 연극 처음 본다고 하면 자리 예매해 드린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에 대한 "증명은 '눈빛'"으로 한다며 눈썹을 까딱였다. 그는 "공연 보러 오시면 딱 눈빛 보고 '합격'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재치 있는 표정과 말투로 말했으나 이들의 눈빛에서 연극에 대한 열정과 진심을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