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준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안태준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자본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사모펀드들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나 주주가치 제고를 기치로 기업을 인수하며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그러나 국내외 대형 사모펀드들이 거대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적대적 M&A를 통해 투자자금 회수를 위한 단기이익 극대화에만 몰두한 나머지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비용을 초래하고 궁극적으로는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미국을 비롯한 해외 주요 국가에서는 이 같은 적대적 M&A에 대항해 기업의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거나 실무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포이즌 필(Poison Pill)은 기존 주주들에게 싼 가격으로 지분을 매입할 수 있는 옵션 권리를 부여해 인수자의 지분율을 희석시키는 방법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다. 포이즌 필 이외에도 해외의 주요 국가에서는 주식의 종류에 따라 의결권 수를 차별적으로 부여하는 차등의결권, 지분율과 무관하게 거부권을 행사하는 황금주 등이 기업의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반면 국내에서는 기업들이 경영권을 방어할 뾰족한 수단이 없는 상황이다. 결국 현 시점에서는 세계적 수준의 기술경쟁력을 가진 우량 기업이라도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자본의 공격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자사주 취득과 처분 또는 백기사 확보 정도가 고작이며, 그 중 자사주를 통한 방어의 경우에는 법적 책임의 위험이나 재무적 부담 등으로 인해 실효성 있는 방어 수단으로 기능하기가 쉽지 않다.

최근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는 고려아연의 사례를 보더라도 국내에서는 적대적 M&A의 타겟이 된 순간 자사주 취득 이외에 활용할 수 있는 경영권 방어 수단이 거의 없고 그마저도 국내외 기관투자자들을 등에 업은 대형 사모펀드의 공세에 대응하기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현행 상법과 자본시장법은 적대적 M&A의 타겟이 될 수 있는 기업들의 손발을 묶어놓은 채 투기적 자본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의 경영권 방어 수단을 도입 내지 확대하기는커녕 정부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현행법 하에서 사실상 유일한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할 여지가 있는 자사주 처분마저 제3자 배정 신주 발행과 마찬가지로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만약 그러한 규제가 혹여라도 현실화된다면 고려아연 사례를 보면서 경영권 방어 수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상당수 기업들로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무능하거나 부도덕한 경영진은 적대적 M&A를 통해서 교체됨이 마땅하다. 그러나 우수한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온 경영진에게는 다양한 경영권 방어 수단을 통해 적대적 M&A 시도에 대항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상식적인 '게임의 법칙'에 부합할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경영권 방어 수단은 재무적으로 부담이 적은 실효적인 수단이어야 한다. 자사주 취득과 같이 재무적으로 부담이 크고 법적 책임의 위험이 수반되는 방어 수단이라면 그러한 방어 수단을 써서 경영권 분쟁에서 이기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 될 공산이 크다.

이제 정부와 국회는 한국형 포이즌필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 1980년대 미국에서 포이즌필을 활용하여 무분별하고 약탈적인 M&A 문제에 대처했듯이, 우리나라도 이제 우량한 기업이 적대적 M&A의 공격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적절하고 실효적인 경영권 방어 제도 수립에 전향적으로 나설 때가 되었다. 세계적인 기술력을 가진 상당수 우량기업들의 경영권이 해외 경쟁업체 또는 투기적 자본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상황에서 정치권과 정부는 만시지탄의 우를 범하지 않도록 경영권 방어 수단의 제도화 논의를 본격화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