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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특별법이 여야 의견 차이로 국회에 4개월 이상 표류 중인 가운데 '주 52시간 예외조항'이 제외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첨단 연구개발(R&D) 경쟁력 확보에 속도를 내려 한 반도체 업계의 계획에도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지난 8일 반도체 특별법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으나 합의하지 못했다. '주 52시간 예외조항'에 대한 여야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면서 국회 법안소위 통과가 무산됐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반도체 특별법 논의가 시작된 지난해 말부터 '주 52시간 예외조항'을 두고 대립해왔다. 국민의힘은 반도체 특별법에 주 52시간 예외를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민주당은 현행 근로기준법상 예외조항으로 해결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야 논의가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리자 민주당은 주 52시간 예외조항을 제외한 법안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하기 위한 검토에 나섰다. 여소야대 상황인 만큼 예외조항을 뺀 반도체 특별법의 통과 가능성이 높다.
첨단 반도체 R&D에 사활을 건 반도체 기업들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반도체 R&D 과정에선 고객의 납기 변경이나 제품 오류 발생 등 예측 불가한 변수가 많아 유연한 근로 시간 운영이 필요하다. 또 R&D 분야는 기술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갖춘 전문 인력이 연속적으로 연구를 진행할 때 유의미한 성과가 나온다.
미국·중국·일본·대만 등 주요국들은 R&D 인력에 대한 무제한 근무를 허용, 적극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우리와의 기술 격차를 빠르게 줄이고 있다. 미국은 고소득 전문직에 대해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를 운영한다. 미국 대표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도 해당 제도를 기반으로 R&D 인력의 근무 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한다. 대만도 노사 합의에 따라 하루 근무 시간을 최대 12시간까지 늘릴 수 있다. 덕분에 TSMC는 R&D 인력에 대해 합당한 보상을 지원하고 근무 시간을 늘려 일하도록 한다.
최근 미국 상호관세에 따른 업계 타격이 예상되면서 국가 차원의 반도체산업 지원이 절실해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상호관세 시행으로 각종 IT 제품의 미국 납품 가격이 평균 46%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IT 제품 가격 상승으로 수요가 위축되면, 이들 기기에 반도체를 공급하는 국내 기업들도 충격을 피하기 어렵다. 미국과 중국의 관세 전쟁이 격화하는 점도 적신호다. 미중 갈등 장기화로 중국 IT 제품 소비가 위축되면 국내 기업 매출도 감소하게 된다.
'반도체 관세' 리스크도 도래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8일(현지시간) 공화당 의회 위원회 만찬 행사 중 대만 TSMC를 상대로 미국에 생산설비를 건설하지 않으면 최대 100% 관세를 물 것이라는 압박을 가했다.
고조되는 업계 위기에 반도체 특별법마저 지지부진하면서 한국반도체산업협회도 최근 성명을 발표했다. 협회는 "글로벌 경쟁 우위를 당연시할 수 없는 중대한 전환점에 놓여 있다"며 "경쟁국의 기술 추격, 보호무역주의 확산,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 등은 우리 반도체 기업의 수출 경쟁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글로벌 경쟁 환경 변화 속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국가 차원의 지원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며 "인프라 구축, 첨단 연구개발(R&D) 촉진, 소부장 공급망 안정화 등의 내용이 담긴 반도체 특별법 논의 가속화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주 52시간 예외조항은 반도체 기업 성장에 중요한 부분"이라며 "급한 개발 일정이나 고객사와의 일정 등 해당 제도가 필요한 경우에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했다. "52시간 이상 근무가 근본적인 반도체 경쟁력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인프라, 반도체 인재 양성 등 다양한 지원이 조화를 이룰 때 (반도체 기업이) 발전할 수 있다"라고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