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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용품만의 아날로그 감성이 있잖아요.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오르는 도구예요."
MZ세대 사이 '텍스트힙'(text hip) '라이팅힙'(writing hip) 열풍이 불면서 문구업계가 함께 웃음 짓고 있다. 지난 4일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 이후 SNS에는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을 필사하는 챌린지가 이어졌다. '다이어리 꾸미기' 인플루언서가 게시한 탄핵 결정문 필사 영상은 지난 11일 기준 조회수 1만9000회에 달하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직후에는 '헌법 필사' 책이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텍스트힙' '라이팅힙'에 문구업계 덩달아 활짝
지난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함께 불어온 텍스트힙 열풍은 현재진행형이다. 텍스트힙은 글을 읽는 행위를 멋지다고 여기는 신조어로 최근 독서에 관심이 많은 젊은 세대의 문화다. 단순히 책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글을 쓰는 라이팅힙으로 번졌다. 자극적인 디지털 콘텐츠에 질린 젊은 세대 사이에 '디지털 디톡스'를 위한 아날로그 행위가 다시 유행하는 것이다.실제로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필사책 판매량은 전년 대비 692.8% 상승했다. 필사 관련 서적은 200종 이상 출시됐다.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필사책 ▲데일 카네기의 자기 관리론 필사 특별판 ▲마음의 소란을 다스리는 철학의 문장들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저녁 한 문장 필사 등 분야를 막론하고 인기다.
텍스트힙 열풍에 웃음 지은 건 출판업계만이 아니다. 독서·필사 유행과 함께 독서 용품이나 문구류가 젊은 층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신사가 운영하는 온라인 셀렉트숍 29CM에 따르면 지난 2월 문구·사무용품의 거래액은 전년 동기 대비 75% 증가했다.
과거와 달리 최근 독서 용품은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 책에 밑줄을 그어도 자국이 남지 않는 투명한 색연필, 편리하게 독서할 수 있게 책을 고정하는 북스토퍼와 독서링 등 제품이 다양하다. 젊은 층의 독서문화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을 넘어 관련 용품을 사 모으는 것으로 확장하고 있다.
"사무용품?" '나'를 드러내는 수단… 문구류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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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류에 대한 젊은 세대의 높은 관심을 보여주듯 이달 열린 29CM '인벤타리오: 2025 문구 페어'는 얼리버드 티켓이 발매된 지 3일 만에 매진됐다. 지난 2일부터 6일까지 진행한 문구 박람회에는 2만5000명 이상이 방문했다. 이번 문구 페어는 문구 브랜드 '포인트오브뷰'와 29CM가 처음으로 함께 개최한 문구 박람회다. 사무·학습 용품 중심의 문구 시장이 개인 취향을 반영한 제품으로 변화한 흐름을 반영했다. 69개 브랜드가 참여한 박람회에서는 문구 브랜드와 디자이너가 협업한 제품을 판매하거나 다양한 체험 콘텐츠를 운영했다.
박람회는 첫날부터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관람객이 방문했다. 입장을 기다리는 시민들은 길게 줄을 서기도 했다. 박람회에 몰린 일명 '문구 덕후'들은 각종 문구류를 둘러보고 구매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지난 6일 문구 페어를 방문한 오지우씨(25·서울 관악구)는 노트 두 권과 마스킹테이프, 책갈피를 구매했다. 오씨는 "평소 문구류에 관심이 많은데 박람회에서 각종 브랜드 제품을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어 좋았다"며 "요즘 사람들이 편리성만 중시하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연필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깨달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문구는 학생 때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존재이고 하기 싫은 일도 하고 싶게 만드는 능력이 있어 의미가 남다르다"며 "아이패드로 필기하다가도 결국 아날로그 노트와 볼펜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말했다.
"MZ세대 텍스트힙과 동반한 문구 소비? 긍정적인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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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문구 페어를 기획한 포인트오브뷰는 문구 덕후 사이에서도 최고의 '핫플'로 꼽히는 문구 편집숍이다. 감각적이고 다양한 문구류를 판매해 '어른들의 문방구'라는 별명도 지어졌다. 1층부터 3층까지 운영되는 이곳은 고전적인 멋과 현대적인 감성이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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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오후 2시 기자가 둘러본 매장은 평일임에도 매장은 가득 찼다. 손님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1층에는 각종 펜과 노트, 엽서와 스티커 등 문구용품이 다양했다. 구경하는 손님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시선을 돌리며 쇼핑에 몰두하느라 얼마 못가 걸음을 멈추는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매장 한편에는 시집이나 소설 등 서적도 마련돼 있다. 매장의 개념을 넘어 전시회를 연상케하는 공간이다. 포인트오브뷰 직원 A씨는 "매장에는 늘 손님이 많지만 요즘 날씨가 좋아서 봄나들이하며 지나가다 들리시는 분도 많아졌다"며 "원활히 문구류를 구경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웨이팅을 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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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독서와 문구 수집을 취미로 가진 박서영씨(25·대구)는 "독서 용품은 하나의 액세서리 같은 역할이라 생각한다"며 "특히 요즘 젊은 세대는 개성이 강해서 편리하면서도 특별한 제품을 원한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SNS에 문구용품 리뷰 콘텐츠가 자주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소비자의 관심이 증가했다는 걸 체감한다"며 "수요가 많은 만큼 옛날보다 다양한 종류의 제품이 쏟아지는 것 같다"고 전했다.
MZ세대는 문구용품을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요소 중 하나로 여긴다.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을 넘어 관련 용품을 모으고 이를 통해 개성을 표출하는 등 독서문화가 확장하고 있다. 나아가 출판 시장의 변화까지 주도하고 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과거에는 북커버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거나 어떤 책을 읽는지 보여주지 않겠다는 심리 등 여러 요소가 작용해 요즘 젊은 세대는 많이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출판·문구 시장에서 무언가를 찾고 소비하는 행위가 유행처럼 번지면 젊은 세대에 책이 더 친숙해질 수 있어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