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5.9
 |
지난 20여년 동안 국내 미디어 소프트웨어 시장을 묵묵히 지켜온 기업이 있다. PC 시절 통합 코덱으로 '국민 플레이어'라 불린 곰플레이어부터 OTT 시대 이전 콘텐츠 유통 플랫폼도 아우른다. 영상 제작툴과 디지털 광고 기업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생존과 성장을 동시에 꾀하고 있는 기업. 곰앤컴퍼니다.
그 선두에는 이병기 대표가 있다. 기술의 대변혁기에 창업에 나섰고 '곰'이라는 친근한 브랜드로 IT(정보기술) 산업의 한 페이지를 적어가고 있다. 이 대표는 AI(인공지능) 시대 영상 산업도 정조준하고 있다. 'ALL ABOUT VIDEO'를 슬로건 삼아 기술과 감성의 균형을 찾겠다는 포부다.
 |
"공부하기 어려운 환경이 오히려 혁신의 토양이었습니다." 이병기 곰앤컴퍼니 대표가 1980년대 중반 학창시절을 회고하며 한 말이다. 당시 대학가는 학생운동의 격랑에 휘말려 교문 출입도 쉽지 않았지만 새로운 문물인 PC에 대한 '호기심'과 '기술'에 몰입한 청년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복받은 세대예요. 한국 IT가 막 시작되면서 기술 변화가 밀려오던 시기였죠." 새로운 기술에 대한 호기심과 몰입이 강했던 그도 누구보다 빨리 조립식 PC와 소프트웨어의 가능성을 감지했고 기술이 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몸소 체험했다.
이 대표는 대학 졸업 이후 삼성전자에 취직해 전략기획실에서 PC 상품기획과 IT 정책을 맡으며 커리어를 쌓았다. '웹마스터'라는 개념을 정의하고 전사 보안정책 입안도 주도했다. 하지만 그는 그 시절을 떠 올리며 "안정된 조직 안에서도 기회는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밖을 향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랬기에 이병기 대표는 삼성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와 1999년 그래텍을 창업했다. 이 회사가 오늘날 국내 대표 콘텐츠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성장한 곰앤컴퍼니다. 창업 초창기엔 '웹 기반 OS'를 구현할 생각에 '팝데스크'를 론칭했다. 인터넷만 연결되면 언제 어디서든 개인 문서에 접근하고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한 것인데 지금의 구글 드라이브나 클라우드 오피스 개념을 2000년대 초반에 구현했던 것이다.
팝데스크가 큰 관심을 끌자 파일의 다운로드 속도를 높여주는 유료 기능도 도입했고 자연스레 매출도 늘었다. 하지만 팝데스크가 저작권 침해 영상을 유통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등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전격 매각을 결정했다.
'만들고(MAKE)·보고(PLAY) 공유하고(SHARE)'
 |
곰앤컴퍼니는 시선을 동영상 시장으로 옮겨 곰플레이어를 개발했다. 곰플레이어는 '통합 코덱'을 탑재해 누구나 쉽게 동영상을 재생할 수 있도록 한 프로그램이다. 직관적인 UI 덕분에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모니터가 4:3에서 16:9로 바뀌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사람들이 문서보다 영상을 더 많이 보게 될 거라 직감했어요. 그 흐름을 읽은 게 결정적이었죠."
곰플레이어의 성공은 자연스럽게 곰TV로 이어졌다. 이 대표는 콘텐츠 유통의 가능성을 보고 사업을 확장했고 CJ로부터 투자를 받아 국내 최초의 온라인 합법 콘텐츠 플랫폼으로 성장시켰다. 프로야구 인터넷 중계와 e스포츠 인터넷 리그도 진행했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는 기술의 논리와 달랐다. 거대 자본을 가진 플랫폼들이 독점 콘텐츠 확보에 열을 올렸고 유통 단가의 증가는 콘텐츠 확보를 어렵게 했다. 소프트웨어 기술기업에게 콘텐츠 유통 사업은 비디오 플랫폼이라는 기술적 경험을 얻었지만 비즈니스에선 시련을 겪게 했다.
이 경험은 회사를 다시 본질로 돌아오게 했다. 곰플레이어의 기술력과 브랜드 신뢰를 기반으로 비즈니스 모델 재정비에 나선 것이다. 이때 이 대표가 꺼내 든 키워드가 '메이크(Make)·플레이(Play)·셰어(Share)'다. '플레이'는 곰플레이어와 곰TV, '메이크'는 영상 편집툴 곰믹스와 이미지 디자인 도구 곰픽, '셰어'는 온라인 비디오 광고로 확장된 영역을 의미했다.
"결국 사람이 콘텐츠를 만들고 소비하고 누군가와 나누는 전 과정을 돕는 게 우리 일이더라고요. 그 세 영역에선 언제나 새로운 기회가 있었습니다."
셰어 영역 핵심인 비디오 광고 사업은 자회사 플랫브레드를 통해 급속도로 성장중이다. 디지털 옥외광고(DOOH) 시장에서 AI 기반 타겟팅과 실시간 데이터 분석까지 아우르며 퍼스트무버로 자리매김했다.
곰앤컴퍼니 다음 도전은 'AI와의 공존' …"사람 냄새 나는 기술 만들 것"
 |
곰앤컴퍼니 다음 도전 과제는 'AI와의 공존'이다. 콘텐츠에 AI 기술을 입히되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갈 틈을 남겨두고 싶다는 게 이 대표 생각이다.
"AI가 영상을 다 만들어준다고 해도 결국 감성을 전달하는 건 사람입니다. 사람의 손길, 휴먼 터치는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꼭 필요합니다."
곰믹스와 곰픽 등 곰앤컴퍼니 주요 소프트웨어에도 AI 기반의 자동 편집, 음성 텍스트 변환 기능이 들어가 있지만 이 대표는 기술의 완성도보다 '사람 냄새 나는 제품'을 강조한다.
"비즈니스의 차별성이 기술로만 완결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앞으로도 AI 기능을 계속 추가할 계획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이 어떻게 관여하고 더 잘 발휘되게 도와줄 수 있느냐입니다. 기술과 감성의 균형, 그게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곰앤컴퍼니는 내실 있는 수익구조를 만들고 고객과 시장의 신뢰를 쌓는 데 더 집중한 후에 상장에 나설 계획이다.
"기업의 가치는 신뢰와 기대감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고객에게 신뢰받고 시장에 '이 회사는 믿고 투자할 수 있다'는 기대를 줘야만 지속가능하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
후배 창업자들에 대한 조언을 묻자 이 대표는 망설임 없이 두 가지를 꺼냈다. 하나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호기심을 잃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해보고 싶은지를 억누르지 말고 기회가 오면 한 번쯤은 과감히 저질러보세요. 그게 결국 창업이고 비즈니스의 시작입니다. 모든 도전은 호기심에서 출발합니다."
"주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법도 꼭 배워야 합니다. 사업은 혼자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좋은 동료, 좋은 파트너와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서 신뢰를 쌓는 게 결국 비즈니스의 본질이에요."
이 대표의 철학은 곰앤컴퍼니의 운영 방침에 그대로 녹아 있다. "저 혼자였다면 (사업은) 시작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죠. 여기까지 버티게 만든 힘도 '사람', 앞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도 결국 사람입니다."
끝으로 이 대표는 곰앤컴퍼니가 '동네 맛집'처럼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다.
"1등 대기업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기술을 꼭 필요할 때 제공하는 회사, 고객에게는 친숙하고 직원에게는 안정감을 주는 회사,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지만 은근히 오래 기억에 남는 브랜드, 너무 앞서지도 너무 뒤처지지도 않는 그런 회사가 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