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86년 4월26일(이하 현지시각) 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 원자력 사고라 불리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는 단순한 사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냉전 종식과 소련 붕괴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대체 이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폭발 사고로 이어진 특별한 실험
![]() |
사고 당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선 부소장 니콜라이 포민이 기획한 특별한 실험이 준비됐다. 포민 부소장은 원자로의 가동이 중단될 경우 관성으로 도는 터빈이 만들어내는 전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력을 공급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을 준비했다. 해당 실험은 원전의 안전장치 구조가 완비됐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기획됐다. 당시 발전소 완공 시간을 맞추고자 무리하게 설계, 시운전이 된 상황이라 안전성 테스트를 서둘러야 했기에 상업 운전을 하는 상황에서 실험이 진행됐다.
이 실험은 사고 발생 전날인 1986년 4월25일 낮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실험을 준비하기 위해 원자로의 정지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를 정지시키고 저출력 상태로 변경했다. 이때 키예프 전력 담당자가 낮 시간대 전력 공급 유지를 요구해 일시적으로 실험이 지연돼 26일 오전 1시부터 오후 2시까지로 변경됐다. 그때까지 계속 저출력 상태로 장시간 안전장치가 꺼진 채 운전됐다.
장시간 안전장치가 꺼진 채 저출력 운전된 상황은 원자로를 불안정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 하지만 실험 지연되자 테스트 모니터링을 위해 체르노빌에 와서 대기했던 도네츠크 전기 엔지니어팀은 당장 실험을 시작하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하고 돌아가겠다고 압박했다. 실험이 미뤄지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했기에 불안한 상황임에도 결국 강행했다.
실험에서 원자로 안전장치 ECCS를 모두 해제하면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가 일어났다. 출력이 갑자기 떨어지자 원자로 내부 균형이 깨졌고 출력이 잘 올라가지 않았다. 이에 알렉산드르 아키모프 선임 연구원은 실험을 중지하고 원자로를 정지시킬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나톨리 댜틀로프 발전소 부수석 엔지니어는 출력을 높여 실험을 속행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실험자들은 저출력 상태에서 수동 제어봉을 6개만 남기고 전부 뽑아 출력을 급격하게 올렸다.
아키모프 연구원은 제어봉을 삽입해 가동을 즉각 중지시키는 안전장치를 가동했다. 하지만 이 일은 결국 사고의 주요 원인이 된다. 제어봉 막대가 한 번에 삽입되자 노심 중단에 있던 흑연이 하단으로 내려가 출력을 조절하던 흡수재인 물을 밀어냈다. 이에 중성자 연쇄 반응이 단시간에 폭발적으로 활성화됐다. 제어봉 가동으로부터 5초 후 1986년 4월26일 오전 1시23분45초에 폭주한 출력을 견디지 못한 체르노빌 원전 4호기는 그대로 폭발했다.
폭발 사고 그 후
![]() |
폭발 사고 이후 사상자들이 속출하자 아키모프 연구원과 댜틀로프 엔지니어는 최악의 대처를 결정한다. 그들은 해당 폭발이 수소 폭발일 뿐 원자로 폭발이 아니라며 급수 투입을 위해 인력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이 일로 직원들 다수가 당하지 않아도 됐을 방사선 피폭을 당해 사망했다. 화재 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대원들도 방사능 보호복도 없이 진화 작업에 나서 방사선 후유증을 겪었다.
사고에 대해 당시 소련 정부는 진실을 은폐하려 했지만 낙진이 스웨덴까지 날아가면서 사고는 세간이 알려졌다. 전 세계에 해당 사실이 알려지자 소련은 뒤늦게 발전소 인근 주민들을 안전지대로 대피시켰다. 발전소 주변 30㎞ 이내의 주민 모두가 철수했다. 방사성 물질이 대량으로 뿌려진 지역에서 탈출이 완료된 때는 8월이었다.
사고 원인이 된 실험을 진행했던 이들은 사고 당일 즉사했거나 방사선 피폭으로 대부분 사고 발생 후 몇 주 사이에 사망했다. 다만 발전소장 빅토르 브류하노프와 실험책임자 댜틀로프는 살아남았다. 소련 정부는 이 두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겨 중대한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해 형사고소를 통해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형기를 다 채우지 않고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댜틀로프도 피폭 피해자였으며 사고 발생 9년 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