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 지금 명함 써서 드릴게요.”


그러더니 그녀는 네모난 모양으로 잘려진 하얀색 한지를 몇장 꺼내 든다. 그 위에 또박또박 이름과 연락처, 이메일 주소를 적어 넣으면 명함 한장이 뚝딱 완성. 어디에도 없는 친환경 명함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하얀 백발에 구릿빛 피부, 노란색 스웨터 안쪽으로 보이는 하얀 모시옷차림도 왠지 그런 그녀의 모습과 잘 맞아떨어진다. <문숙의 자연치유>라는 책을 내고 자연건강식과 요가의 전도사를 자청하고 있는 영화배우 문숙의 얘기다. 



20대의 그녀는 화려한 영화배우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주연을 맡았던 <삼포 가는 길(1975)>의 고 이만희 감독과 23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한 드라마틱한 사랑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그녀는 충격과 슬픔으로 배우생활을 그만두고 홀연히 미국행에 올랐다.



 
린에린예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이곳저곳에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며 살아온 그녀가  현재 5년째 머물고 있는 곳은 하와이의 마우이섬. 그녀는 대자연이 펼쳐진 이곳의 오두막에서 자연건강식과 치유식, 요가 등의 강의와 상담을 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다. 30년만에 잠시 고국을 찾은 문숙을 <행복수다>에 초대했다. 파란만장한 삶의 끝에 마음의 평화를 얻는 데 성공한 그에게 경쟁에 지친 도시인이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는 법을 물어보았다.

 

Q. <문숙의 자연치유>라는 책은 자연건강식과 요가에 관한 책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욕망을 비우는 과정을 담은 책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누구보다 화려한 인생을 살았는데 그런 삶보다 지금의 비우는 삶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A. 젊을 때는 내 삶 자체가 욕망이었다. 왜 내가 이토록 욕망하는지, 이 욕망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몰랐다. 아무도 내게 욕망을 조절하는 법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그런 내 삶에 제일 처음 의심을 품게 된 건 이 감독님이 돌아가셨을 때였다. 내가 지금까지 알아왔던, 믿어왔던 세계가 그때 흔들렸던 것 같다.


물론 그 이후에도 나는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다. 어떻게 보자면 그림 공부 역시 화가로서의 ‘폼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선택했던 면이 없지 않다. 고급 사교계에서 지내며 정말 남부러울 것 없었다.


누가 봐도 행복해야만 하는 상황인데 나는 행복할 수 없었다. 그 괴리가 커져갈수록 자꾸만 병이 나고 아프기 시작했다.  ‘이건 아닌 것 같다. 내가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플까’를 고민하게 됐다.

.




Q.그런 과정을 어떻게 극복했나?

A. 결국은 나를, 내 욕망을 ‘비우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지금까지 내가 맞다고 생각해서 내 손으로 이뤄낸 것들을 다시 허물어뜨려야 한다.
 
나는 이걸 벽돌을 허무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 내가 벽돌을 하나씩 쌓아 올릴수록 나도 모르는 자만심이 생긴다. 벽돌이 높은 성벽을 이루면 내 주변에 햇볕이 들어오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다. 내가 이루어놓은 것이 많아질수록 내 자만심이 나를 숨막히게 하는 굴레가 된다.


 

Q. 최근 ‘비움’이 화두가 되고 있다. 하지만 숨가쁜 경쟁사회에서 사는 도시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조금 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은 없나?


A. 나에게는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요가’와 ‘음식’이었다. 요가는 나를 비우기 위한 마음 훈련과정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가를 하게 되면 옆 사람의 동작과 내 동작을 비교해보고, 옆 사람보다 더 폼 나게 잘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긴다. 요가가 나를 위해 성취해내야 할 또 하나의 무엇이 되는 것이다.


우선 그 마음가짐을 버리라고 조언하고 싶다. 대충대충 해도 좋다. 요가를 하면서 내가 나의 움직임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 그 과정을 통해 나의 감각이 열리고, 내가 나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된다. 나를 깨우는 과정이다. 


요가를 하면서 음식이 중요하다는 걸 더 절실히 깨달았다.(그녀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자연치유식 요리연구원에서 조리사 자격증을 받고, 메사추세츠주의 쿠시연구소와 크리팔루수도원에서 인턴 자격으로 치유식 공부를 계속했다. 후에 코네티컷 주의 동양영양학 본원에서 치유식 과정을 마쳤다.)


Q.‘내가 나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표현을 썼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A. 예를 들어 누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고 하자. 순간적으로 분노가 생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은 단순히 내 체험이다. 나 자신은 항상 그대로다. 그런데 내 경험과 나를 동일시하고 외부의 조건에 의해 나의 행복이 좌우되곤 한다.



쉽게 주식을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대 그래프의 움직임에 따라, 심지어 내 손에 한번도 쥐어보지 못한 돈 때문에 우울해하거나 우쭐해 한다. 회사 내에서의 승진도 마찬가지다. 남보다 빨리 승진하건, 반대로 승진을 못하건 나는 본질적으로 변화가 없다. 승진에 대한 나의 경험을 나 자신과 동일시 하기 때문에 쉽게 좌절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이다.

 

내면의 나와 외부의 경험을 분리해 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그렇게 해서 외부의 조건에 관계없이 내면의 나를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나의 중심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Q. 경쟁 스트레스에 심하게 노출돼 있는 도시인들은 더 실천하기 어려울 것 같다.


A. 맞다. 도시에 산다는 건 모든 것이 다 스트레스다. 하지만 어렵다고 불가능한 건 아니다. 어려운 만큼 더 강하게 나를 단련할 수 있지 않은가. 


Q. 요즘 옷을 입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옷을 입을 때 내 몸이 편한 것보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더 기준에 둔다. 이런 습관이 너무 오래 묵어 고착화돼 버렸다. 이런 습관을 어떻게 넘어서나?


A.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사회 안에 섞여서 살아갈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특히 도시에서 살면서 남들과 동떨어져 나의 길만 갈 수도 없지 않은가. 옷 얘기를 하셨으니 옷을 입을 때도 물론 기본적인 옷의 역할은 존중해야 한다. 몸을 보호한다든지, 나를 표현한다든지,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표현한다든지. 하지만 이를 넘어서서 과도하게 남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결국은 내가 이러한 차이를 ‘의식’하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른 선택이다. 내가 옷을 하나 고를 때도 남들의 시선에 기준을 두고 있다는 걸 의식한다면 그 날 입을 옷의 선택이 달라질 것이다. 이런 걸 의식하면서 매 순간 선택을 달리해 나가는 것이 바로 생활 속 연습이다.



Q. 요가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 맑은 음식이라고 표현했는데, 도시에서는 이런 게 좋은 줄 알지만 먹기 힘들고, 먹으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A. 맞다. 말은 쉽지만 도시에서는 참 힘들다. 모두 다 회식을 가는데 나 혼자 다른 걸 먹겠다고 튈 수도 없지 않은가. 이 역시 아까 말했듯 순간순간의 선택이다. 그리고 이 선택을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내 몸에 더 좋은 음식인지 잘 알고 항상 의식해야 한다.

 
인스턴트 보다는 통음식, 그러니까 홍당무나 오이처럼 자연에서 나온 그대로의 살아있는 음식이 내 몸에 더 좋다.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같은 회식 자리에 있더라도 삼겹살 보다는 당근을 선택할 확률이 높다.


또 하나 팁을 주자면 음식을 섭취할 때는 ‘목,화,토,금,수’의 오행을 맞추는 것이 좋다. 쉽게 색깔로 보자면 푸른색, 붉은색, 흰색, 노란색, 검은색을 맞춰 먹길 권한다.


음식의 오행
목-푸른색. 채소. 신맛. 간을 해독하는 데 효과가 좋다.
화-붉은색. 토마토. 쌉싸름한 맛. 심장에 좋다..
토-노란색. 호박. 단맛. 췌장이나 비장에 좋다.
금-흰색. 무나 고춧가루. 칼칼하면서도 매콤하고 씁쓸한 맛. 폐에 좋다.
수-검은색. 짠맛. 검은 콩. 신장을 보호해 주는 데 좋다.



Q.하와이에서의 삶은 어떤가? 하루 일과는?


A. 정착한 지 5년쯤 됐다. 말 그대로 대충대충 산다. 해가 일찍 뜨는 곳이라 해 뜨면 새벽에 일어나 해 질 때까지 기르는 개 한 마리와 산책도 즐기고 사람들도 만나고 밖에 나가 멍하니 앉아있기도 한다. 옷을 잘 차려 입고 나갈 필요도 없어서 잠옷바람으로 돌아다닌다. 한마디로 단순 소박하다.


 

Q.경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나? 요즘 국내에도 귀농과 귀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경제적인 벽에 부딪혀 주저하게 된다.

 

A. 지인이 나에게 그러더라. “선생님처럼 살려면 돈이 더 많이 들겠다”고. 그런데 나는 진짜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 옷을 새로 살 일도 없고, 신발도 싸구려 한 켤레면 몇 년은 거뜬하다. 의,식,주 모든 것에서 소비가 줄어드니 사실 돈을 적게 벌어도 먹고 사는 데는 충분하다.


돈을 많이 벌 필요가 없으니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조금만 벌어도 만족한다. 사람들을 불러다가 음식에 대한 얘기를 해주고, 가르쳐주기도 한다. 사람과 만나는 일도 즐거운데 심지어 나에게 돈을 주기까지 하니 얼마나 좋나.


트렌드를 따라가려고 하면 진짜로 돈이 많이 드는 것 같다. 그러나 트렌드가 아니라 정말로 나를 비우고 소박한 생활로 돌아가자면, 돈 들어갈 일이 별로 없다. 경험해보니 그렇다.



Q. 앞으로의 계획은?



A. 인간의 욕망 때문에 지구가 너무 많이 아프다. ‘가이아(Gaia) 의식’ 운동이라는 게 있다. 가이아는 살아있는 지구를 부르는 이름이다. 지구와 우리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더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고 ‘선택을 달리’하며 ‘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운동의 목표다. 정해진 조직도 없고 리더도 없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출판하고 자연치유식이나 요가에 대한 강연을 하는 것도 이러한 과정의 일환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구를 의식하고 변화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