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필 연구위원
▲서동필 연구위원
심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하나의 학문(심리학)으로 자리잡을 정도로 사람의 심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그동안 많은 심리학적 실험이 이뤄져 왔는데, 그 중에는 재미있기도 하고 때론 조금은 섬뜩한, 그래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실험도 많다. 소위 '밀그램 실험'과 '착한 사마리아인 실험'도 그런 실험 중 하나다.

두 실험의 공통된 결론은 사람의 행동과 심리가 타고난 본성 외에 주변의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밀그램 실험에서 교사역을 맡은 많은 실험 참가자들은 높은 전기충격이 매우 치명적인 것임을 알면서도 단지 교수의 지시라는 외부환경에 영향을 받아 단추를 눌렀다.
 
그 다음 예의 실험에서도 병자를 도운 착한 사마리아인과 관련된 강연을 하러 가는 신학도라 하더라도 시간이 없다고 하면 길가에 누워있는 병자를 도와주는 비율이 크게 떨어졌다. 시간이 많고 적음이라는 외부환경에 행동의 양식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고령의 자화상
여기 나이 들어가면서 삶을 힘겨워 하는 우리나라 고령자들의 자화상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통계자료가 있다. 주관적 행복도와 자살률 관련 자료인데, 두 자료 모두 나이가 들수록 부정적인 양상으로 변화된다.
▲제공=우리투자증권100세시대연구소
▲제공=우리투자증권100세시대연구소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인 행복도는 30대를 정점으로 이후에는 줄곧 낮아지기만 한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나이들수록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이들수록 자살률이 빠르게 증가한다. 특히 남성이 심하다. 여성의 경우에는 연령대별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다가 70대가 돼서야 자살률이 크게 올라가지만, 남성의 경우 전 연령대를 거치면서 자살률이 꾸준히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나이들수록 행복도가 떨어지면서 자살률이 높아지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혹자는 그랬다. '자살은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을 넘어설 때 나타난다'고. 그렇다면 나이들수록 현실을 인내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 고통이 증가한다는 것인데, 주변을 둘러보면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남성의 경우 40대에 접어들면서 직장과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나 부담감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한다. 이런 부담감속에 50대에 진입하면 이제 실직의 두려움까지 가중된다.

게다가 이 시기는 소위 꺾이는 시기, 즉 인생의 반이 어느새 훌쩍 지나가버린 시기여서 정신적으로도 혼란을 경험하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동안 살았던 삶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하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한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남의 탓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고 행복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낙관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남의 탓'이란 말이 있다. 썩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말은 아니지만, 때로 정신건강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마음가짐일 수 있다.

인생의 전환점, 즉 소위 서드에이지(40대~70대) 시기에는 다양한 측면에서 균형이 필요하다. 타인지향적인 삶과 자아지향적인 삶의 균형이 필요하고, 일과 여가의 균형이 필요하며, 젊음과 나이듦 사이의 균형 역시 필요하다. 여기에 더불어 필요한 것이 현실주의와 낙관주의의 균형이다. 낙관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실현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바로 '네 탓'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밀그램 실험에서 치사수준의 전압을 눌렀던 63% 사람은 과연 얼마만큼의 죄책감을 느낄까. 모르긴 몰라도 자신이 사람을 죽여놓고도 생각만큼 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옆에 있는 저명한 대학의 교수가 계속 누르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나는 눌렀다'라고 스스로 위안과 합리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남의 탓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병자를 도와주지 않았던 착한 사마리아인 실험의 신학도 역시 '나는 왜 아픈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을까'하는 것과 같은 자괴감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이 신학도에게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자기를 정당화할 수 있는 핑계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밀그램 실험의 교사역을 맡았던 실험 참가자와 착한 사마리아인 실험의 신학도가 잘못된 상황의 원인을 주위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나는 왜 이런 사람일까', '나는 왜 이런 본성을 가지고 있는 걸까'라며 끝없이 자기 내면에서만 원인을 찾으려 했다면 그들은 아마도 심각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을 것이다.

지나치게 주변의 탓으로만 돌리고, 자기내면의 문제를 등한시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지만, 어떤 부정적인 현상이나 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책하고 우울해 할 필요도 없다는 얘기다.
 
긍정적이고 좋은 것은 나의 능력과 자질, 본성 등 자신의 내면에서 원인을 찾고, 나쁜 것은 주변의 환경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상황을 좀 더 낙관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 거꾸로 나쁜 것의 원인을 내 안에서만 찾는 행위는 오히려 자신을 점점 더 움츠려 들게 하고 상황을 비관적으로만 흐르게 할 수 있다.

지나친 자기긍정과 낙관주의 역시 경계해야 하지만, 모든 불행과 정신적 고통이 내 안에서만 비롯된 것일 수는 없다. 따라서 현실을 좀 더 낙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여유와 마음의 안정을 찾고 현실주의와 낙관주의의 균형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보고자 하는 대로 보이며, 대개의 일은 보는 대로 이뤄진다.

 
◆밀그램 실험

미국 예일대의 심리학과 교수였던 스탠리 밀그램이 실시했던 '복종'과 관련된 실험이다.밀그램은 공고를 통해 실험 참가자들을 모집하고, 이들을 각각 교사와 학생역으로 분류했다. 이후 교사역의 참가자들은 학생역의 참가자에게 문제를 내고 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전기충격을 주도록 교수로부터 지시받았다.

전기충격은 아주 약한 수준의 15볼트부터 시작해 문제를 틀릴 때마다 15볼트씩 단계적으로 높아졌다. 가장 높은 전압은 450볼트였으며, 이는 치사수준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장 높은 수준의 450볼트 단추까지 지시대로 눌렀을까. 당초 밀그램은 채 1%도 안되는 사람들이 이 단추를 누를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험 결과는 놀랍게도 63%의 사람이 학생역의 참가자가 고통스런 신음소리 이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을 때까지 이 단추를 눌렀다. 물론 전기충격과 학생역의 실험 참가자는 모두 가짜였다.

◆착한 사마리아인 실험

미국의 심리학자 존 달리와 대니얼 뱃슨이 실행했던 실험이다. 한 대학의 신학과 학생들에게 강연을 부탁했는데 한 부류에게는 임의의 주제로, 또 한 부류에게는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즉 멸시당하지만 길가에 쓰러져 있는 병자를 도왔다는 착한 사마리아인과 관련된 내용을 부탁했다.

그리고는 간격을 두고 한명씩 다른 건물에 있는 강연장으로 이동시켰는데, 출발하기 전에 시간이 없으니 빨리 이동할 것을 주문하기도 하고, 혹은 시간이 많으니 여유있게 가라고 이르기도 했다. 그리고 강연장으로 가는 길 도중에 매우 아파 보이는 사람을 누워있게 했다. 이후 어느 부류의 학생들이 그 사람을 도와주는지 관찰했다.

실험 계획자들은 사마리아인과 관련된 주제를 부탁받은 부류가 더 많이 도와 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부탁받은 강연의 주제와는 상관이 없었고, 그보다는 시간이 많고 적음이 관건이었다. 시간이 많다고 통보받은 부류는 60% 넘게 병자를 도왔지만, 시간이 없다고 통보받은 부류는 불과 10%만이 병자를 도왔다. 신학도였음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