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일터 ‘값진식육’은 제 값어치를 뛰어넘는 고기와 음식으로 이 사회에 자신의 값어치를 발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종국에는 미술과 접목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꿈도 꾸고 있다. 제값 못 하는 음식, 제값 못 하는 군상이 즐비한 이 시대에 그의 가치 바이러스를 해부해본다.
◇ 실패와 귀촌으로 내려진 외식인생 1막의 가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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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월간 외식경영) |
이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니라고. 아카데믹한 교과서 속 디자인과 해머와 소음과 먼지로 뒤범벅된 현장의 디자인 작업은 간극이 너무 컸다.
대안으로 그가 택한 길이 외식 분야였다. 군대에서 체험했던 취사병 생활이 나름 참고가 됐다. 틈나는 대로 고기를 취급하는 외식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생계형(?) 아르바이트이자 동시에 인생 탐색전의 성격을 띤 아르바이트였다.
대학 졸업 후 육류 유통회사에 들어갔다. 매장에서의 고기 판매와 고기 배송 등 일선 라인 부서 업무는 물론, 총무나 기획 같은 스태프 부서 업무까지 경험했다.
크고 작은 여러 육류 유통업체에서 일하면서 육류 유통에 관한 업무와 지식을 두루 익혔다. 나름대로 고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다. 그 후 고기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대형 외식업체에 입사했다. 전국적인 체인망을 가진 식당이었다.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김 대표는 여기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 본사에서 강릉에 새로 문을 연 약 495.87m2(150평)이 넘는 대형 점포의 점장으로 마침 그를 지목했다. 실전 경험을 할 좋은 기회인데다가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주저 없이 수락했다.
그러나 1년 정도의 점포 운영 성적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현장에서 발생하고 부딪히는 온갖 문제들은 그의 생각과 능력 밖에 존재할 때가 많았다. 스스로 자문했다. ‘그동안 너무 자만하지 않았나? 정말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리더로서의 가치가 있나?’
고민 끝에 사표를 냈다. 자신을 위해서나 회사를 위해서나 자리에 머물러 있을수록 손해라고 생각했다. 생각 끝에 식구들과 함께 처가가 있는 전북 부안으로 내려갔다. 인생의 나침반을 원점에 놓고 새로운 가치를 모색해보려고 했다.
자의반 타의반의 귀촌은 1년 남짓 계속됐다. 무항산이면 무항심이라고 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했지만 시골에 외식 전문가가 할 만한 일은 없었다. 젊은 가장이 일정한 일거리 없이 세월을 죽이는 일도 참 못할 노릇이었다.
◇ 다시 낮은 바닥에서 ‘가치’라는 보물을 건져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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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월간 외식경영) |
체계가 잡힌 식당 열 곳 정도를 골랐다. 한식, 중식, 일식, 양식… 업종은 다양해도 모두 성공한 식당들이었다. 그 식당들을 찾아서 한두 달 정도씩 허드렛일을 했다.
자기 소유는 아니었지만 한 때 대형 외식 점포 책임자가 설거지와 청소 담당자가 됐다. 경기도 양평의 어느 유명 한식당에서는 두 달 중 한 달 동안 내내 마당만 쓸었다. 어느 기업형 대형 갈빗집에서는 노동 강도가 너무 높아 몸이 아파서 2주 만에 그만두기도 했다.
걸레질과 수세미질을 하면서 그는 식당 바닥과 그릇만 닦은 게 아니었다. 우선 헛된 자만심과 욕심으로 얼룩진 자신의 마음을 닦았다. 그리고 본래 목적이었던 식당의 운영체계를 눈여겨보면서 자신의 실력을 닦았다. 스스로 낮은 곳으로 몸을 던지니 참으로 배울 것이 많았다.
체력과 정신력이 이전보다 강해진 것은 물론, 음식을 만들고 식당을 관리하는 사람들과 맺어진 인맥도 커다란 수확이었다. 애초 의도하지 않았던 음식과 서비스에 대한 지식도 늘었다. 진짜 가치 있는 것들은 모두 낮은 곳에 있었다. 그 가치들을 부지런히 주워 모았다.
그동안 쌓은 역량을 바탕으로 지인과 함께 베트남쌀국수 집을 열었다. 예상대로 점포 운영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미국 뉴욕에 날아가 ‘최고의 베트남쌀국수 맛집 베스트 5’를 벤치마킹하는 열정도 보였다. 음식 수준은 만족스러웠다. 매출이나 수익도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좀 더 스스로 가치있는 점포를 운영하고 싶었다.
자신의 점포에 대한 갈증은 2012년 12월에 해갈됐다. 지금의 <값진식육>을 개점했다. 좋은 주인이 좋은 고기를 좋은 손님에게 파는 것, 그래서 주인과 손님이 흐뭇하고 행복한 것, 그것이 김 대표가 꿈꿨던 이상적인 고깃집 모델이었다. 그런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쌓아온 마장동 인맥을 가동했다. 좋은 고기를 유리한 조건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좋은 부위는 따로 떼어내 비싼 값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구나 부담 없이 한우의 전 부위를 먹어볼 수 있게 했다. 등심, 갈비, 부채살, 업진살을 고루 망라하는 모둠구이(150g 1만3000원)가 대표 메뉴다.
◇ 이상주의 고깃집 주인이 꿈꾸는 미래 가치는 ‘행복 사회’
김 대표는 한국 최초의 이상주의 고깃집 주인이다. 그동안 김 대표의 가치에 공감하는 손님이 늘었다. 비록 떼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정직한 고기로 점포도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김 대표의 지갑에는 엄청난 수표가 들어있다.
발행인은 김 대표 본인이다. 크기는 일반 수표와 거의 동일하지만 디자인과 액면가는 전혀 다르다. 수표의 앞면에는 ‘인생 성공을 위한 나의 주문’이란 제목 아래 10가지 스스로에 대한 주문이 적혀있다. 대부분이 모두 자기 자신을 일깨우기 위한 잠언들이다. 그런데 마지막 항목인 제10항이 눈길을 끈다.
‘나는 내 나이가 몇 살이든 스무 살의 열정을 유지하며 한 가지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 부를 이루고 사회에 보탬이 된다’
어찌 보면 누구나 소망하는 바다. 그런데 올해 서른아홉 김 대표의 지난 10년을 역 추적해보면 이 말이 단순한 수사에 그치지 않았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정말 스무 살의 열정으로 살아왔고 실제로 지금도 그렇게 산다.
그는 노력의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로 다음 대목에 나온다. 그가 노력하고 분투하는 이유는 부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하긴 이 세상에 돈 많이 벌어 부유하게 되길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다. 보통 사람은 이게 최종 목표다. 그러나 이 사람의 진짜 최종 목표는 바로 그다음 구절에 있는 ‘사회에 보탬이 되겠다’다.
우리나라 사람은 대체로 부자에 대해 존경심을 갖지 않는다. 대개는 정권과 결탁한 특혜나 반칙을 써서 이룬 부이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정직한 땀으로 청부(淸富)를 이루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부를 바탕으로 보다 원대한 꿈을 꾼다. 그 꿈을 김 대표는 ‘가치 시스템’이라고 불렀다.
그의 부인은 미술과 심리학 분야 전문가다. 지금도 부안에서 아동들을 위한 미술 관련 교육과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자신의 외식사업과 부인의 미술문화 활동이 서로 소통하는 공간과 사회를 2020년에 완성하는 것, 그래서 외식과 미술을 통해 모두가 행복해지는 공동체, 그것이 그가 구상하는 가치 시스템의 본체다.
지금도 그의 내부에서는 행복과 가치 바이러스가 꾸준히 배양되고 있다. 언젠가는 한 번 이 사회를 지독하게 감염시킬 그 날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