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이기범 기자
머니투데이 이기범 기자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이 내세우고 있는 한진그룹으로부터의 ‘계열분리’에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한진해운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해운업황이 장기침체에 놓이면서 유동성 위기에 처했다. 고전이 지속되자 최 회장은 지난달 시아주버니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급한 불을 껐다.

하지만 이번 지원으로 한진해운의 계열분리가 ‘물거품’이 되는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오고 있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삼남인 고 조수호 회장은 2006년 세상을 떠나기 전 아내인 최 회장에게 한진해운의 독립적인 경영을 당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속된 한진그룹 계열분리 작업

최 회장은 고 조수호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은 후 한진해운의 계열분리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한진가(家)의 법률 대리인인 법무법인 광장을 통해 수년째 계열분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11년에는 대한항공 주식 4만3355주를 매각하고 최 회장의 두 딸 조유경·유홍씨도 각각 대한항공 주식 1만8320주, 1만9160주를 처분했다. 지난해에는 정석기업 주식 4만4180주를 정리하는 등 계열분리를 위한 준비를 해왔다.

특히 최 회장은 2009년 지주사인 한진해운홀딩스가 설립될 당시 조양호 회장에게 사업회사인 한진해운의 지분을 택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조 회장은 최 회장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 회장은 한진해운의 독립경영은 인정했지만 계열분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연매출 10조원 규모의 한진해운이 그룹에서 떨어져나가면 한진그룹의 재계 서열은 떨어진다. ‘한진(육)-한진해운(해)-대한항공(공)’으로 이어지는 물류 체계도 무너진다.

한진해운홀딩스 설립 당시 재계에서는 조 회장이 계열분리를 마다하는 이유를 두고 한진해운이 경영위기에 몰리면 흡수를 강행할 것이라는 추측까지 오갔다.

지난 8월 지주사 ‘한진칼’ 설립 당시 투자은행(IB) 쪽에서 한진해운홀딩스를 증손회사로 편입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질 당시엔 대한항공과 한진해운의 갈등이 빚어진 바 있다. 당시 한진해운 측은 그동안 추진해온 계열분리가 물 건너갈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반발했다.

◆결국 한진그룹에 지원 요청

결국 최 회장은 조 회장에게 지원을 부탁했다. 재계 관계자는 “최 회장이 조 회장에게 직접 SOS를 쳤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당초 조 회장에게 2500억원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진해운 지분 구조 등을 감안해 1500억원만 지원하기로 결의했다는 후문이다.

재계는 이번 자금 지원으로 대한항공이 한진해운의 경영권에 간섭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계열분리를 준비해온 최 회장으로선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대한항공이 지원하며 요청한 담보는 한진해운홀딩스가 보유한 한진해운 지분 4502만7519주(36%) 중 1920만6146주(15.4%)다. 만약 한진해운이 1500억원을 상환하지 못하면 대한항공은 한진해운홀딩스보다 지분 5%가 부족한 한진해운의 ‘2대주주’로 올라서게 된다. 한진해운이 대한항공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게 된다.

최 회장은 이 같은 이유로 인해 그동안 조 회장에 대한 자금 지원 요청을 꺼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식을 담보로 1500억원을 빌리기로 한 것은 그만큼 한진해운이 다급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재계 관계자는 “한진해운이 급한 불은 껐지만 스스로의 능력으로 1500억원을 마련하기 힘들다는 점을 대내외적으로 알린 셈이 됐다”며 “이번 일은 전반적으로 한진해운에 부정적”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한진해운 관계자는 “이번 대한항공의 지원은 독립경영 여부와 무관하다”며 “대한항공의 한진해운 경영 관여에 있어서도 한진해운이 지분을 담보로 삼았을 뿐 ‘만약’이라는 조건은 말이 안 된다”고 일축했다.

대한항공 관계자도 “이번 지원은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수송보국’ 정신으로 일군 한진해운을 정상화시키겠다는 의지를 갖고 대한항공과 한진해운 두 회사의 최고경영진이 주채권 은행과 협의한 것”이라며 “한진해운은 현재 공정거래법상 한진그룹에 속해 있으나 이미 오래 전부터 독립경영을 해 오고 있고 앞으로도 그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이번 대한항공의 지원으로 유동성을 회복하고 앞으로 해운업황 회복을 토대로 자구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다만 대한항공의 자금 지원은 기간이 1년이라 이 안에 상환하지 못하면 ‘만약’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

◆코앞에 닥친 회사채와 CP 상환

문제는 한진해운이 실적회복에 나설 수 있느냐다. 해운업황이 회복되지 않는 이상 한진해운의 흑자 전환은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더구나 해운업계 전문가들은 본격적인 업황회복이 2015년이나 돼야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진해운은 지난 2분기까지 1156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3분기도 영업적자상태다. 누적된 적자로 인해 한진해운의 부채비율은 상반기 말 연결기준 830%다.

이 와중에 갚아야 할 돈은 잇따라 밀려온다. 올해 안에 상환해야 하는 기업어음(CP) 상환 액수만 무려 2100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내년 3월 1800억원, 4월과 9월에 각각 600억원, 1500억원 등 3900억여원의 회사채와 기업어음 만기가 예정돼 있다.

재계 관계자는 “한진해운이 내년에 당장 적자폭을 줄일 수도 있겠지만 단기간에 업황이 좋아지기는 힘들 것”이라며 “이번에 지원 받기로 한 1500억원도 1분기 정도 견딜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번에 자금을 지원받으면서 한진해운이 한진그룹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는 더욱 어려워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최 회장이 든 잔이 독배일지 성배일지 단정 짓기는 아직 이르다. 최 회장의 한진해운 계열분리 작업이 지속될 지도 시장 상황을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프로필
▲1962년 5월3일 출생 ▲세이신여자대학교 졸업 ▲2007년 한진해운 부회장, 양현재단 이사장 ▲2008년 한진해운 회장 ▲2009년 한진해운 대표이사 회장, 한진해운홀딩스 대표이사 회장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0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