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지역 학군으로 이사하는 '한국 맹모'들에게 최근 꼬리표 하나가 더 붙었다. 바로 이공계 선호현상. 성적이 좋은 학생은 물론 중하위권 학생의 부모들까지도 이과를 고집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가치를 평가받는 중소기업들도 이공계 출신 인재를 선호함에 따라 자연스레 문과가 아닌 이과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이 늘게 된 것. 그 실태는 어떨까. <머니위크>가 서울 금천구 지역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를 찾아 이공계 선호현상을 점검해봤다.

◆ 학생·학부모 할 것 없이 '무조건 이과'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물론이고 이제는 중하위권 학생들까지도 진로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막연히 이과를 고집합니다. 최근 매스컴을 통해 대기업에서 이공계 출신 인재를 선호한다는 뉴스가 쏟아져 나오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이과를 졸업해야한다는 비정상적인 공식이 자리 잡게 된 것이죠. 비단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자식이 문과로 진학을 희망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고 나서 억지로 이과 진학을 강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곤 합니다.”

서울시 금천구에 위치한 A고등학교에서 1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이모씨(51)는 최근 학생들 사이에 이과 진학 ‘붐’이 불고 있는 것과 관련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상위권 학생들의 경우 이제는 문과로 진로를 정하는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 학교는 최근 3년 사이 문과 학급 수를 9개에서 6개로 축소했다. 문과로 진급을 희망하는 학생들의 발길이 크게 줄어듦에 따라 학급 수 축소 외에는 뾰족한 대안을 찾기 힘들었던 것. 반면 이과계열 학급은 6개에서 9개로 늘어났다.

기자가 방문해 살펴본 학교의 모습은 최근 불고 있는 이과 선호현상이 ‘풍문’이 아닌 명확한 ‘시대의 흐름’ 임을 실감케 했다. 대입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의 경우 과거 흔히 찾아 볼 수 있었던 수포자(수학 포기자)의 모습은 자취를 감췄으며, 문·이과가 구분되지 않은 1학년 학생은 십중팔구 이과로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학교에 재학 중인 1학년 김모군(17)은 “소위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은 이과 진학을 염두에 두고 학업 목표를 세우고 있다”며 “공부를 잘하는 학생뿐만 아니라 성적이 중·하위권에 머무는 학생들까지도 대부분 이과로 진학을 희망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2학년 학생 이모군(18)은 “문학이나 사학 등 문과계열에 관심이 많은 학생의 경우에도 부모님의 등살에 떠밀려 이과로 진로를 정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며 “대기업에서 이공계 출신 학생들을 선호한다는 이유로 대다수의 부모들은 자녀가 이과로 진학하기를 희망한다”고 털어놨다.


 
/사진=뉴스1 양동욱 기자
/사진=뉴스1 양동욱 기자

◆ 문과, 대입 문턱 높고 취업서도 ‘외면’

안타깝지만 문·이과 학생들의 졸업 후 행보를 살펴보면 이 같은 이과 쏠림현상을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는 게 현실이다. 고등학생의 최대 관심사인 ‘대학입학’에 있어서도 문과생이 이과생보다 넘어야 할 문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신학용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새정치민주연합)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통계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문과계열의 수능 응시생이 33만7134명인 반면 대학정원은 15만4227명에 불과해 응시생 대비 경쟁률은 2.19대1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이과계열의 수능 응시생은 23만5946명, 이과계열 대학정원은 15만480명으로 응시생 대비 경쟁률이 1.57대1인 것으로 나타나 문과계열 경쟁률보다 낮았다. 문과계열의 대학 입학 경쟁률이 이과보다 높은 것.

반면 문과생은 진학 경쟁률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졸업생 기준 취업률은 오히려 낮았다. 전국 4년제 대학의 취업률을 계열별로 분류한 결과 문과계열에 해당하는 인문계열(47.8%), 사회계열(53.7%), 교육계열(47.5%)의 취업률은 이과계열에 해당하는 공학계열(67.4%), 자연계열(52.5%), 의약계열(71.1%)과 비교할 때 최대 23.6%포인트까지 차이가 났다.

대기업들에서도 이공계 우대현상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신입사원의 80%가 이공계 출신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최대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이공계 비율은 무려 85%에 달했다. 경쟁률도 인문계는 75 대 1, 이공계는 8.8 대 1로 확연히 대비됐다.

현대자동차그룹도 이공계 신입사원 비율이 7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쟁률 역시 인문계 200 대 1, 이공계 50 대 1로 큰 차이를 보였다. 이밖에 SK그룹 신입사원 비율도 인문계 20% 초반, 이공계 70% 후반이었다. LG그룹 주요 계열 3사(전자·화학·디스플레이)의 경우 인문계 비율은 15%에 불과했다.

올해도 대기업들의 이공계 선호현상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매출액 상위 300대 기업을 대상(응답 206개 기업)으로 2014년 신규채용 계획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 56.8%가 올해 신규채용에서 문과보다 이공계 출신을 더 많이 뽑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이과 통합형 교육, 사교육 양산 우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는 문·이과 통합형 교육 카드를 꺼내들었다. 오는 2018년부터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을 시행해 문과와 이과 사이에 차별을 없애겠다는 것. 개정안을 살펴보면 과목을 공통과목(국어, 수학, 영어, 공통사회, 공통과학, 한국사) 및 선택과목(일반선택과 진로선택 구분)으로 재구조화했다. 선택과목은 1학년 때 공통과목을 이수한 뒤 거치게 된다.

이에 따라 현재 문과와 이과로 나눠 선택 실시되는 수능이 문·이과 구분 없이 통합형 교과체제로 치러진다. 즉, 2018학년도부터는 고교에서 문·이과계열 구분 없이 1학년 때 공통과목으로 배우는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한국사는 수능에서 필수과목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학생들의 수업 부담은 늘고 오히려 능률은 저하될 것이라는 문제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수능 과목과 난이도는 그대로인 상태에서 통합과학, 통합사회가 추가된다면 그만큼 수강해야 할 수업 양과 학습 부담이 늘지 않겠냐는 것.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계자는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을 통해 통합과학, 통합사회가 수능에 추가된다면 학생들의 수업 부담이 지금보다 더 커질 것은 자명한 일”이라며 “이는 결국 사교육으로 이어져 새로운 사교육 시장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5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