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 위치한 한국거래소 서울사옥 정문 앞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트럭에서 짐을 내리고 무대를 설치했다. 쇼핑백에서 현수막을 꺼내 가로수 사이에 내걸기도 했다.
거대한 스피커가 곳곳에 놓이자 이미 출동한 경찰들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노란색 폴리스라인을 설치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자신들의 일에 충실했다. 시간이 지나 오후 5시쯤 되자 사람들은 막대기를 꺼내 적당히 거리를 재고 깃발을 세웠다. 점퍼 위에 푸른색 조끼를 덧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30분가량이 더 지나자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퇴근길로 도로가 붐비기 시작했다. 길위에 모여든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다. 몇명이 나서서 풍선과 팜플렛을 나눠준다. 그들은 오와 열을 맞춰 길 위에 주저앉았다. 마침내 6시가 되자 ‘외침’이 시작됐다.
이날 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증권업종본부(이하 사무금융노조)에 속한 15개 증권사의 노조와 NH농협증권노동조합, 한양증권노동조합 등 총 17개 회사의 노조다.
이들은 이날 증권노동자 총력결의대회를 열기 위해 거래소 앞에 모였다. 사무금융노조 관계자는 “하이투자증권 지부를 사수하기 위해 모였다”고 설명했다. 이날 노조가 추산한 대회 참가인원은 600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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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한별 기자 |
◆ 여의도 구조조정 잔혹사
최근 3년여간 여의도 증권가에는 계절을 잊은 칼바람이 불었다. 주식시장이 박스권에서 등락을 거듭하자 투자자들은 하나둘 증시를 떠나고 증권사들의 실적 또한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다.
결국 증권사들은 살아남아야 한다며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문을 닫는 증권사도 나왔다. 매물로 나와 이리저리 팔리는 증권사도 생겼다. 이곳저곳에서 희망퇴직을 시행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58개 증권사 직원 수는 지난해 3만6561명으로 집계됐다. 전년(4만245명)대비 3684명 줄었다. 최근 2년간 증권사 감원 규모는 6241명에 이른다.
새해를 맞았지만 구조조정 소식은 계속 들려온다. 감원이 없을 것으로 예상됐던 회사마저 인력을 줄이려 하고 있다. 올해 첫 구조조정의 테이프를 끊은 곳은 하이투자증권이다. 이 회사는 지난 1월 영업지점 20곳 폐쇄와 희망퇴직 및 권고사직 250명 등을 제시한 구조조정안을 노조에 통보했다. 전체 임직원의 26%, 국내 지점의 41%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이 회사가 구조조정에 나선 것은 지난 2002년 CJ투자증권 시절 이후 13년 만이다. 지난 2008년 현대중공업그룹에 인수되고 난 이후로는 처음이다.
이날 박정현 하이투자증권 노조위원장은 “회사가 임금단체협상 이후 이틀 만에 권고사직을 포함한 명예퇴직을 통보했다”며 “임단협에는 하이투자증권 측이 구조조정을 고민할 경우 노조와 상의한 뒤 결정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희망퇴직도 아닌 권고사직을 협상조차 하지 않은 채 통보로 처리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위원장은 “회사의 자구노력이 선행되지 않은 일방적 구조조정의 부당함을 알리고 맞서 싸우기 위해 투쟁에 나섰다”고 덧붙였다.
◆ 칼바람 계속 이어질까
이날 증권노조가 길 위에 모인 공식적인 이유는 하이투자증권의 구조조정 반대다. 다만 단순히 ‘옆집’의 우울한 소식에 투쟁을 지원하겠다는 이유만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이투자증권의 구조조정이 올해 증권가 전체로, 구조조정 칼바람의 방아쇠로 작용할 가능성을 걱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날 이규호 사무금융노조 증권업종본부장은 “하이투자증권이라는 ‘둑’이 무너지면 전체 증권노동자가 무너지는 것”이라며 구조조정의 ‘전염’을 우려했다.
증권업계의 실적만 놓고 본다면 올해 구조조정의 우려는 적어 보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증권사의 실적을 잠정집계한 결과 당기순이익은 1조7032억원으로 전년(2592억원)대비 1조4440억원(557%) 늘었다.
증권업계의 자기자본순이익률(ROE)는 지난해 4.1%로 전년대비 3.5%포인트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ROE가 높다는 것은 자기자본에 비해 그만큼 당기순이익을 많이 냈다는 얘기이며 해당 회사가 효율적인 영업활동을 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럼에도 노조가 구조조정을 걱정하는 이유는 세부적으로 보면 업황이 회복된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로 인해 실적이 나아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증권업계의 실적이 크게 개선된 이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채권관련 자기매매이익 때문이다. 기준금리 인하로 인해 금리가 하락함에 따라 채권값이 올랐다. 덕분에 증권사의 지난해 채권관련 자기매매이익이 6조1584억원으로 전년대비 2조1513억원 늘었다.
즉, 증권사들이 자구노력을 통해 군살 빼기로 실적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채권가격의 움직임에 힘입어 실적이 호조를 보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기준금리가 인상되는 등 채권가격이 급락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증권사의 실적은 크게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금융감독원도 증권업계의 수익성이 큰 폭으로 개선됐으나 지난해 증권사의 채권관련이익과 당기순이익의 동조화 현상이 짙어졌다며 우려를 표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증권업계에서 채권투자 관련 과당경쟁, 쏠림심화 등으로 재무건전성 악화 또는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리스크 관리를 지도하고 그에 대한 모니터링을 지속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사태의 원흉(?)이 된 하이투자증권의 관계자 또한 “회사 입장에서는 구조조정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하이투자증권의 리테일 부문의 경우 지난 2009년을 기점으로 영업수익이 지속적으로 감소했다”며 “지난해에는 386억원으로 적자가 확대된 상황이어서 전체 손익에 큰 부담이 됐다”고 말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회사로서도 지난 수년간 임원 축소와 임원 급여 삭감(20~50%), 부서장 급여 삭감 등의 자구책을 실시했다는 것. 그는 “최근 몇년새 구조조정을 실시한 회사들 역시 이와 같은 이유로 구조조정을 결정했을 것”이라며 “다들 비슷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노조가 걱정하는 것처럼 하이투자증권의 구조조정을 시작으로 올해도 예년처럼 증권업계에 칼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현재 하이투자증권 경영진은 노조의 반발로 인해 지난 2월23일로 예정됐던 권고사직 시행을 연기한 상태다. 현재 사측은 노조와 협의하기 위해 대화를 진행 중이다. 노조 측은 경영진과 대화를 지속하겠지만 만약 사측이 일방적으로 구조조정에 나설 경우 법률적으로 대응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7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