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체험의 '꿀팁'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아름다운 풍광에 그림 같은 집은 그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집과 사람, 그 이야기를 들으러 안동 농암종택으로 간다.

농암종택 명농당
농암종택 명농당

◆ 때때옷을 입은 선비
‘이현보는 자손들이 모인 가운데, 부모님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피웠다.’

<퇴계선생문집> ‘이현보 행장’에 나오는 글귀다. 당시 농암선생은 70이 넘은 양반이었다. 한양에서 명예로운 퇴직을 하고 임금님의 축하와 동료 관료들로부터 축시를 선물받으며 낙향한 당대 내로라하는 선비였다. 많은 제자를 거느린 대학자이자 집안의 어른이었지만 오로지 관심은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데 있었다. 우리에게 <어부가>로 유명한 영남문학의 대가가 체면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옷을 입고, 노래하고 춤을 췄던 것이다.


그의 효심은 확대돼 구로회(九老會)를 만들고 양로잔치를 열었다. 그가 지은 애일당은 ‘부모님이 살아계신 하루하루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곳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80세 이상의 어르신을 초대했다. 어른을 공경하는 데 신분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열린 생각으로 화합의 잔치를 연 것이다. 이 행사는 이현보 가문의 양로잔치가 돼 대대로 전승됐다.

선생은 생각이 유연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양의 주요 관직을 마다하고 30여년간 지방의 목민관을 지냈다. 이렇게 한 데는 부모님 가까이에서 효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깔려 있었다. 이웃하고 있는 퇴계 이황과도 각별한 우정을 나눴는데, 농암선생과 퇴계선생의 나이차이는 35살이었다. 학문과 철학을 논함에 있어 나이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퇴계종택과 농암종택은 지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안동댐 건설로 아랫집과 윗집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두 집은 여전히 선비들이 천천히 오갔을 운치 있는 오솔길 사이에 존재한다. 낙동강을 따라 이 길을 걷노라면 한폭의 산수화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퇴계선생은 이곳을 몹시 사랑해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절로 시가 나오고 생각이 깊어질 만한 길, 마치 처음부터 저기에 있었던 것처럼 조화롭게 자리 잡은 농암종택에 다다르면 나도 모르게 이현보 선생의 <어부가>를 찾아 읽어보게 된다. 속세를 떠나 자연을 친구 삼아 살아가는 가짜 어부, 가거옹의 노래가 저절로 시가 되고 창이 된다.


'… 일엽편주를 만경파(萬頃波)에 띄워두고 인세(人世)를 다 잊었거니 날 가는 줄을 아는가….'
(조각배를 파도에 띄워두고 인간 세상을 다 잊었으니 시간 가는 것을 알겠느냐)

◆ 농암종택과 이성원 종손

사실 농암종택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산과 강과 집의 조화로 보자면 너무나 자연스러워 믿겨지지 않지만 안동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였던 집을 이관한 것이다. 구불구불 길을 따라 들어오면 병풍 같은 바위 절벽과 낙동강이 펼쳐지는데, 여기에 그림처럼 자리 잡은 집이 농암종택이다. 대문채를 지나면 사랑채가 정면이 아닌 오른쪽으로 보이고 저 끝에 긍구당이 보이는데 여기가 끝이 아닌 시작이다. 긍구당을 지나 명농당, 분강서원, 애일당까지, 집은 낙동강을 앞개울 삼아 장구목의 수려한 병풍바위와 마주하며 길게 이어진다. 보통 다른 고택들은 생가와 서원이 떨어져 있는데 이곳은 종택과 서원이 나란히 자리 잡아 이 집의 규모가 더 크게 느껴진다. 처음 오는 사람은 장소의 아름다움에 한번 놀라고, 이 크고 아름다운 집과 그 집이 옮겨져 복원됐다는 것에 또 한번 놀란다.

농암종택 긍구당과 사랑채
농암종택 긍구당과 사랑채
농암종택 전경
농암종택 전경

현재 이 집의 주인은 농암선생의 17대 종손 이성원 선생이다. 집을 옮겨 온 주인공이다. 그의 아버지는 양반의 나라에서 시민의 시대로 이어지는 온갖 굴곡의 근현대사를 겪었고 선생 자신은 수몰의 위기와 집의 보존을 담당했다. 태어날 때부터 당신이 짊어져야 할 ‘종손’으로서의 책임이 있었다. 젊은 날 몹시 방황했고 번민과 고통의 시간을 겪었다. 예전 같으면 집을 돌보고 각종 허드렛일을 맡아줄 머슴이 있고 그만한 재산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 스스로 머슴이자 집사이고 종손의 역할까지 담당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았을 인생살이를 겪으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였던 농암 선생의 <어부가>를 온몸으로 체득했는지도 모르겠다.
농암종택은 한옥스테이로 운영 중이다. 고택을 체험한다면 반드시 집과 거기서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권한다. 그것이 없다면 단지 하룻밤의 ‘불편함’을 경험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수백년 전 이곳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췄던 선비, 이 집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종손, 종손의 아내가 되어 매일 아침 따뜻한 밥을 짓는 종부…. 그들의 이야기는 수려한 경관만큼이나 다채롭고 깊이가 있어 ‘숙박’과 ‘체험’이라는 말로는 대체할 수 없는, 진하고 따스한 가르침이자 추억이 될 것이다.

◆ 황포돛배 타고 월영교까지

요즘 개목나루에 가면 황포돛배를 탈 수 있다. 나루에서 배를 타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강에서 보는 경관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배를 타고 가다 보면 강을 가로지르는 목재다리가 유난히 눈에 띈다. 이 월영교는 ‘원이 엄마’의 사랑이야기를 기리며 미투리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다. 원이 엄마는 남편을 일찍 여읜 조선시대 여인이다. 택지지구 개발로 발견된 무덤에서 31세로 숨진 건장한 체구의 남자 미라가 발견됐고 이와 함께 편지도 나왔는데 이상한 것은 한켤레의 미투리였다. 자세히 보니 병에 걸린 남편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으로 머리카락을 섞어 짠 신발이었다. 편지에는 남편에게 보내는 아내의 마음이 나타나 있다. ‘원이 아버지에게’로 시작하는 이 한글 편지는 담담한 필체 속에 그 사랑이 느껴져 더 슬프고 아련하다.

개목나루 황포돛배
개목나루 황포돛배
황포돛배
황포돛배

배에서 내려 월영교를 건너 본다. 가을이 깊어진 강가는 붉고 노랗게 알록졌고 원이 엄마의 마지막 편지 글귀가 자꾸만 떠오른다.
‘… 나는 꿈에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그들은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 ‘끝없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 또 했을 것이다.

만추의 안동…. 깊은 계절이 진하게 느껴지는 여행이다. 

월영교
월영교
월영교
월영교

[여행 정보]

안동 농암종택 가는 법
경부고속도로 - 영동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평택제천고속도로 - 중앙고속도로 - ‘소백산국립공원, 풍기, 봉화’ 방면으로 우측방향 - 소백로 - ‘안동, 봉화, 영주IC’ 방면으로 좌측방향 - 죽령로 - 가흥교차로에서 ‘안동, 봉화, 영주IC’ 방면으로 우측방향 - 경북대로 - 평은터널 - 평은로 - 옛고개삼거리에서 ‘태백, 봉화’ 방면으로 좌회전 - 예봉로 - 원천삼거리에서 ‘도산온천, 도산서원, 녹전’ 방면으로 우회전 - 녹전로 - 온천로 - ‘봉화, 청량산’ 방면으로 좌회전 - 퇴계로 - 온혜교차로에서 ‘태백, 봉화’ 방면으로 좌회전 - 퇴계로 - 가송길

[대중교통]
안동터미널 - 1번 버스 탑승 - 교보생명 정류장에서 67번 버스 탑승 - 가송리 정류장 하차

[주요 스팟 내비게이션 정보]
농암종택: 검색어 ‘농암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 612번지
개목나루: 검색어 ‘개목나루’, ‘안동 시립민속박물관’ / 경상북도 안동시 성곡동 815-1

농암종택
문의: 054-843-1202 / http://www.nongam.com

개목나루
문의: 054-823-7456 / http://www.gaemoknaru.com
황포돛배: 대인 8000원 / 소인 5000원
국궁(활쏘기) 체험: 1순(5발) 3000원 / 2순(10발) 5000원

● 음식
대자연가든: 농암종택 근처 식당으로 찜닭이 과하게 맵지 않고 간이 무난하다. 식사 하고 산책하기 좋다.
안동간고등어정식 1만원 / 안동간고등어구이 1만2000원 / 안동찜닭 2만8000원
054-852-3222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62-57

까치구멍집: 월영교 근처에 있는 헛제사밥이 유명한 집이다. 헛제사밥은 뜨겁게 끓이지 않은 찬음식이다. 탕국과 함께 담백한 맛을 즐긴다.
헛제사밥 9000~1만원 / 양반상 1만5000원 / 안동간고등어 1만2000원
054-821-1056 / 경상북도 안동시 상아동 513-1

● 숙박
농암종택: 농암종택에서 한옥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숙박에 불편함이 없도록 샤워시설을 갖추었고, 아침을 예약하면 종부의 밥상을 맛볼 수 있다.
숙박비: 7만~15만원 / 아침식사 7000원 (미리예약)
예약문의: 054-843-1202 /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 공원길 146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0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