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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주방이 없는 집이다.” 무슨 말일까? ‘가나다라 호텔’을 만들고 싶다는 아트 디렉터 테리정을 강남구 신사동 카페 C27에서 만났다.
주방을 뺀 집이 가장 완벽한 집이라고 말하는 테리정은 자신만의 콘셉트와 본인이 디자인한 제품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가나다라 호텔’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작업실마저 간단한 컵라면을 끓일 가스버너와 커피머신이 전부라고 한다.
‘한글은 촌스럽다’는 인식을 뒤바꿔놓을 그의 ‘가나다라 프로젝트’가 현재 신사동 카페 C27에서 전시 중이다. 신윤복의 ‘미인도’를 배경으로 어우러지는 한글의 자음 디자인은 해석을 요하지 않는다. 클림트의 ‘키스’, 에곤실레의 드로잉이 그 배경이 되어도 상관없다.
‘가나다라 프로젝트’는 한글 자음을 이용한 상품 디자인을 전시, 쇼 등 다양한 형태로 보여주는 행사다.
몰라도 보기편한, 숨어있는 메시지를 캐치할 수 있다면 그것대로 좋은, 그런 작품을 만드는 그가 스타일디렉터이자 아트디렉터로 활약하고 있는 테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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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가나다라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 배경은
오래 전부터 한글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특히 패션 광고대행사 디렉터 시절에 해외 촬영을 다니면서 (한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영어나 일어... 각국 언어는 상품으로 만들어도 충분히 트렌디하고 감성적인데, 왜 '한글‘에는 이런 느낌이 안 날까? 한글은 예쁠 수 있는데 예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다?’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때부터 나는 'I♥NEWYORK'처럼 하나의 브랜드 가치를 지닌 나만의 한글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한글로 부끄럽지 않은 그래픽을 만들어보자’라는 일념으로 2015년 7월, 본격적인 한글 콜라보 작업 ‘가나다라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이를 위해 구조적으로 한글의 형태를 해석하기 시작했고 한글은 자음과 모음, 또 받침이 함께 쓰여서 디자인적인 작업이 까다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해 한글의 자음만을 이용해 로고 베이스 디자인을 만드는데 집중했고, 현재는 직접 그린 캐릭터와 실력 있는 포토그래퍼의 사진을 이용한 한글 프로젝트 작품을 카페 C27에 전시 중이다.
Q2. 타 브랜드나 디자이너의 한글 콜라보 작품을 알고 있는가
‘노앙’과 배우 ‘유아인’ 콜라보 ‘뉴키즈 노앙’은 SEOUL의 ‘S’를 한글 자음 ‘ㅅ’으로 변환한 위트있는 작품을 선보였다. 단순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다.
이번 2016 S/S 시즌 ‘카이’의 디자이너 계한희와 배달 어플리케이션 서비스기업 ‘배달의 민족’이 콜라보한 ‘배민의류’쇼를 보았다. 옷의 기능에 따른 적절한 한글 텍스트를 패션에 유쾌하게 녹여낸 그의 작품 또한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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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3. 드라마 ‘꽃보다 남자’, ‘상속자들’에서 각각 '구준표 스타일링', ‘제국고 교복 스타일링’ 이 화제가 됐다. 두 작품의 스타일 디렉터는 바로 테리정, 이들 스타일링의 주안점을 둔 부분은
사람들은 스타일 디렉터와 스타일리스트가 하는 일을 종종 착각한다. 전체적인 스타일 기획을 잡고 스타일리스트에게 지시하는 업무가 바로 스타일 디렉터다.
어느 날 송병준 그룹 에이트(드라마 제작사) 대표가 내 스튜디오에 찾아와 “아시아 프로젝트 스타일링을 의뢰하고 싶다. 당신만이 할 수 있다”라며 말을 꺼냈다. 그때 그 작품이 바로 KBS 2TV ‘꽃보다 남자’다.
우연히도 ‘꽃보다 남자’의 일본 원작 만화와 드라마를 봤던 터라 귀가 솔깃했다. 나는 원작 드라마 속 마츠모토 준의 스타일링이 늘 아쉬웠다. 상견례 자리에 키 체인을 허리에 걸고 나타나질 않나. 배우의 신장이나 개성을 고려치 않은 일본식 스타일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라 더욱 이 드라마 스타일 디렉팅에 관심이 생겼다.
특히 F4의 멤버로 신인배우 4명을 캐스팅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아직 자신만의 컬러가 없는 하얀 도화지 같은 그들에겐 어느 것을 입혀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완벽하게 소화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상속자들’에서는 전체 디렉팅이 아닌 ’학교’라는 공간에 초점을 맞춘 전체 세팅작업을 했다. ‘스타일링해서 입는 교복’을 목표로 제국고 교복 스타일링의 총책임을 맡았으며 왕관과 띠를 두른 상속자들의 로고 역시 내가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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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4. 함께 작업한 스타나 캐릭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에피소드를 이야기 해 달라.
2005년이었나? 패션 일을 오래하다 보니 슬럼프가 왔다. 이때 친했던 셀럽 한 명이 이번에 한 번 같이 ‘획’을 남기는 작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콘텐츠를 만들었고, 작업은 1년에 걸쳐 이뤄졌다. 서로가 많이 지쳤지만 그만큼 또 좋았다. 그가 친구인 배용준이다.
드라마 작업은 역시 ‘꽃보다 남자’... 당시 많은 이슈가 되기도 했는데, ‘퍼’를 두른 구준표의 첫 등장을 기억하는가. F4 네 명의 캐릭터 사이에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줘야하는 구준표의 첫 등장을 많이 고민했다. 고민 끝에 나는 문득 동물 다큐 프로그램에서 본 사자를 떠올렸다. ‘동물의 왕’ 사자, 그런 ‘사자들의 왕’은 더욱 무성하고 거친 갈기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 갈기를 모티브로 그의 어깨에 커다란 퍼를 둘러 스타일링했다.
‘꽃보다 남자’에 나왔던 옷들은 거의 자체 제작했다. 네 명의 캐릭터를 맡은 배우가 모두 신인이었기에 더욱 잘 받았던 콘셉트라고 생각한다. 당시 관련 브랜드들의 매출도 많이 났고 패션으로 당시 배우들 누구도 욕먹지 않아 기뻤다.
Q5. 관심있는 브랜드가 궁금하다.
오랫동안 좋아하는 브랜드라기보다 때마다 좋아하는 브랜드가 바뀐다. 이 쪽 업계가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분석하고 쫓는 일이어서일까. 단, ‘에르메스’는 늘 좋아해왔다. 그 브랜드 자체가 갖고 있는 느낌과 히스토리가 마음에 든다. ‘에르메스’는 ‘오렌지’라는 컬러를 고급스런 컬러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든 혁신적 브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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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6.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대학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나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사실 내 꿈은 패션디자이너였다. 외국 패션스쿨로 유학을 하려다 같은 예술계통에 있는 부모님의 반대에 못 이겨 정신을 차리고 보니 포장디자인회사에 입사해 근무하고 있었다. 퇴사 후 나는 카피가 판을 치던 당시 ‘광고’와 ‘패션’이 접목된 ‘패션광고’를 떠올렸고, 한 패션 광고대행사에서 보브, 보이런던 등 해외브랜드를 다루는 업무를 시작했다.
이후에도 다양한 패션 비즈니스 업무를 도맡아 했다. 하고 싶은 거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내 인생을 바꿨다. ‘패션’이라는 큰 틀 안에서 나는 가지를 다듬어 왔으며 앞으로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 점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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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7. 테리정의 취향이 궁금해진다
축적된 정보는 새로운 것을 만든다. 외출을 하지 않고도 집에서 충분히 작업에 영감이 되는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할 때가 즐겁다. 나는 어쩌면 병적으로 모으고 보고 편집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업이 마무리되어 가는 저녁 시간에는 집이나 작업실에서 음악을 듣거나 다큐멘터리, 영화를 시청하는 등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나는 유치한 영화가 좋다. 현실적이지 않은...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이나 ‘배트맨시리즈’. 영화감상을 하며 등장인물의 배경이 되는 세트를 계속해 돌려 본다.
특히 2014년 개봉한 영화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의 세트와 미술은 최고다. 극장에서 두 번 이상 본 영화가 채 3편이 넘지 않는데 이 영화가 바로 그 중 하나다. 모든 물건을 일직선으로 정리하는 습관 때문인지, 웨스앤더슨 감독의 대칭강박에 매력을 느낀다. 나 역시 집에 정전에 대비해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정리하는 정리벽이 있다. 지금 보이는 이 가방 안에서 나는 필요한 물건을 눈감고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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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8. 최근 테리정이 빠져있는 것이 있다면
요즘 빠져있는 드라마가 한 편 있다. tvN에서 방영하는 ‘치즈인더트랩’이다. 원작을 보진 않았지만 스토리도 괜찮고 여자 주인공 ‘홍설’ 역 김고은만의 연기와 스타일링이 좋다. 꾸미지 않아도 참 예쁜 배우라고 생각한다. 이런 드라마 의뢰가 왔다면 당장에 했을 듯싶다.
‘치즈인더트랩’은 나를 매료시킬 만화적 판타지가 깔려있다.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정신세계가 마음에 든다.
얼마 전 종영한 ‘응답하라 1988’은 딱 내 세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라 끌리지 않는다. ‘응팔’을 보고 있자면 내가 이미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상상력의 장애로 작용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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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9. 작업을 위한 영감을 주로 어디에서 받는지
패션광고 일을 15년 정도 했다. 2000년 초반에서 2010년까지 패션업계에서 일하며 외국에 자주 나갔다. 담당하던 브랜드의 특성상 일은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진행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1년에 4개월을 외국에 있을 정도였으니까.
여행의 목적이 비즈니스인 나는 재밌게도 동경, 뉴욕, 파리 등 각 나라의 가장 패셔너블한 도시에만 가게 됐다. 머무는 도시의 특성상 전원보다는 좋은 호텔과 가까운 쇼핑센터를 찾게 됐고 나는 그게 좋았다. 옷 한 벌을 들고 처음 비행기에 몸을 싣던 내게 어느새 출장가방 하나가 생겼고, 그 안에 ‘나만의 물건’을 채워나가는 것이 즐거웠다.
호텔에 가면 준비해온 ‘나만의 물건’으로 또 하나의 집을 꾸미는데 푹 빠진다. 준비해온 수건과 컵을 배치하고 ‘내 공간’을 만드는 일을 시작한다.
예술은 그렇다. 쉽게 만날 수 있다. 당신의 손끝, 당신의 공간... 모든 라이프에서 예술적인 영감은 넘치고도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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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0. 해외 출장이 잦다. 트렌디한 패션의 도시를 자주 방문하는 테리정이 이제껏 가보지 않았던 도시 중, 가보고 싶은 곳은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패션이 발달하고 최고의 스태프가 있는 곳에 가고 싶다. 패션의 도시밀라노가 있는 이탈리아를 아직 못 가봤다. 좋은 스태프가 없어서가 이유라면 이유... 기회가 되면 이태리에 가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파스타를 시칠리에 가서 꼭 먹고 싶다. 스페인도 좋다. 좋아하는 축구팀이 있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도 눈으로 보고 싶다.
Q11. 현재 어떤 프로젝트를 또 준비하고 있는가
현재 진행 중인 ‘가나다라 프로젝트’는 전시 목적이 우선이므로 상품 판매는 다른 오프라인 팝업스토어에서 진행할 것으로 협의 중이다. 면세점에 입점 예정인 ‘서울’이라는 콘셉트의 새로운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이 작품전시는 올 2월 오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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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2.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 전하고 싶은 말은
‘예쁜 건 불편하다, 춥다’ 그렇다면, 본인이 입을 수 있는 수준에 맞는 옷을 입으면 된다. ‘기능적이면서 디자인적으로 예쁜 것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충족할 수 있는 수준의 제품을 만들면 된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모든 디자인이 ‘가나다라’로 채워질 호텔을 만들고 싶다. 벽지와 타일을 비롯해 커튼, 작은 소품까지도 전부 내가 디자인한 그런 호텔... 현재 수건과 머그컵 등 작은 소품에 한글을 적용한 작업을 구상 중이다.
나는 앞으로도 라이프 지향적인 콜라보 상품을 계속해서 만들 생각이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예쁜 그런 작품은 그것대로 좋다. 나와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즐기고 싶은 브랜드를 만드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이런 작가나 ‘진짜’ 참여할 수 있는 셀럽이 있다면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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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가나다라 프로젝트, KBS 2TV '꽃보다 남자',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vN '치즈인더트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