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제주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 넘치는 매력을 고작 사계절로 나눌 수 있을까. 3월부터 유채가 피어나 4월에 벚꽃이 지면 고사리가 쑥쑥 올라온다. 5월의 하늘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스치는 비마저 그림 같다. 일단 제주로 가자. 그 다음은 제주가 다 알아서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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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 |
◆고사리 따러 오름
제주는 고사리 장마가 시작됐다. 4월에서 5월 사이 보슬보슬 비가 내리는 날이 많은데 이와 함께 쑥쑥 올라오는 것이 고사리다. 예전에는 제주 사람들만 알던 ‘고사리 철’이 이제는 여행자에게도 소문이 나서 겸사겸사 제주로 오는 이들이 많다. 아무래도 '채취'에 관해서는 '엄마들'이 강자다 보니 고사리가 자랄 듯한 언덕에는 어르신들이 많다. 차림새로 보아 '전문가'는 아니다. '여기까지 와서 볼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러고 있나…' 하겠지만, 제주도에 360개쯤 있는 오름과 곶자왈은 와본 사람만 아는 매력이 있고, 그 길가에 고사리까지 있으니 여행을 두배로 즐기게 된다.
아이들하고 고사리를 따면 할 이야기도 많다.
"이게 ‘고사리손’이구나!"
잎을 피우기 전에 말려 있는 모습이 정말 아기들의 꽉 쥔 주먹 같다.
"이게 고사리야?"
다 핀 고사리는 우리가 식탁에서 보는 그런 고사리가 아니다. 화려하게 펼쳐진 모습이 전형적인 양치식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친구끼리 왔다면 사는 얘기, 자식 자랑, 남편 흉보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다.
고사리가 어디 있냐고? 제주도 어디에나 있다. 돌담 아래, 오름, 목장, 억새밭, 가시덤불…. 재미있는 건 어디에나 있지만 나만 아는 장소는 따로 있다는 점이다. 제주도 말에 ‘고사리밭은 며느리한테도 안 가르쳐 준다’고 한다. 그렇다고 여행자가 고사리 따서 장사할 거 아니니 그 대단한 고사리 서식처까지 알 필요는 없다. 그저 재미로 하는 일. 숙소에서 살짝 데치고 하룻밤 말려 가져갈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가끔 고사리를 따라가다 길을 잃는 여행자가 있다. 여행은 잊고 고사리에 욕심을 내다 숙소에 버리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설마하는 걱정이지만, ‘자, 여기서 저기까지 지금부터 10분 동안 한 봉지만 따세요’ 또는 ‘이 고사리로는 공항 통과가 안됩니다’ 같은 제한성 프로모션이나 경고문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한번 해보면 매년 기다리게 되는 고사리철도 곧 있으면 끝난다. 짧은 봄을 더 아쉽게 만드는 귀엽고 정다운 여행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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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사슴이오름 |
◆큰사슴이오름
한자로 ‘대록산’(大鹿山), 한자와 한글의 뜻이 같다. 큰 사슴이 있으면 작은 사슴도 있나? 그렇다. 바로 옆에 작은사슴이오름이 있다. 두 오름 다 사슴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어디서 봐야 사슴인지는 하느님만 아실 것 같다. 오히려 ‘예전에 사슴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쪽을 믿어 보기로 하고 오른다.
길은 둘레길처럼 옆으로 비스듬히 났다. 비탈길을 조금 오르면 나무 계단이 이어지는데 계단 사이로 풀들이 자라 초록의 계단이 됐다. 길가에 상산나무가 있어 오르는 내내 상큼한 향에 취한다. 잎을 살살 만지면 향이 더욱 진하게 풍겨나는데 이 향을 담아갈 통이 있다면 좋겠다. 제주도 오름이 다 그렇듯 정상 부근에 가면 분화구가 있다. 큰사슴이오름은 숲이 우거져 분화구 모습을 명확하게 보기 힘들다. 대신 울창한 원시림과 제주에서만 자라는 식물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 제주에 다니다 보면 소나무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라난 오름을 만날 수 있는데 자로 잰 듯 줄을 선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다. 이것은 박정희 정권 시절 산림녹화사업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너무 줄을 잘 맞춰 심어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흐트러짐이 없다. 반면 큰사슴이오름은 자연스럽고 풍성하다. 사전을 찾아보면 ‘오름’ 이 아닌 ‘산’으로 등재됐는데 왜 여기를 ‘산’이라고 하는 지 알 것 같다. 올라온 수고는 ‘오름’ 정도지만 느껴지는 울창함은 깊은 산이다.
정상에서는 화산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평탄면을 볼 수 있다. 말이 어렵지 드넓은 초지가 보인다는 얘기다. 이곳은 예부터 임금에게 진상하던 ‘으뜸말’(갑마, 甲馬)을 키워내던 곳이다. 오름 입구에서 국궁장을 보고 ‘뜬금없이 여기서 왜 활을 쏘나?’ 했는데, ‘말 타고 활 쏘기’는 썩 잘 어올리는 조합이다. 평지에서 시선을 올려 멀리 보면 치마폭을 펼쳐 앉은 듯한 오름이 보인다. 제주도 오름의 여왕이라는 따라비오름이다. 그러고 보니 가시리에는 자랑할만한 오름이 많다. 고 김영갑 선생이 왜 가시리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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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랑말 체험공원 |
◆조랑말 체험공원
큰사슴이오름 옆에는 조랑말체험공원이 있다. 지금은 임금을 위해 갑마를 키우진 않지만 여행자들이 와서 말의 고장 가시리를 제대로 느끼고 체험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승마체험장 옆으로 조랑말박물관이 있다. 말과 관련된 유물과 문화예술작품 100여점이 전시됐고 제주의 목축문화, 조랑말의 생태와 습성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에 관심이 없다면 3층 옥상정원으로 올라가 보자. 계단 몇개 올라왔을 뿐인데 전망이 좋다. 큰사슴이오름과 따라비오름, 그 사이로 펼쳐진 초원이 아름답고 바로 아래 승마장 트랙에서는 근거리 초원으로 말을 타고 나가는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
이곳의 승마체험은 구체적이다. 트랙을 돌며 말과 사람이 몸풀기를 마치면 근처 초원으로 슬슬 나가 볼 수 있고, 다녀와서는 수고한 말에게 먹이를 주기도 한다. 울타리를 벗어나 볼 수 있다는 점과 모든 과정을 통해 말과 커뮤니케이션한다는 것이 매력적이어서 아이와 함께 온 부모들은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
조랑말 캠핑장쪽으로는 카페가 있다. 이곳에서는 커피와 차, 조랑말주스, 말똥쿠키, 말똥과자 같은 재미있는 이름의 스낵을 즐길 수 있고 조랑말 꾸미기, 말똥쿠키 만들기 같은 체험도 해볼 수 있다.
큰사슴이오름에서 고사리 따며 정상에 올랐다가 승마체험장에서 말 타고 차 한잔을 마시면 하루가 다 가겠다. 해가 길어지고 있지만 제주 여행의 하루는 언제나 아쉽고 빠르게 흘러간다.
[여행 정보]
제주공항에서 큰사슴이오름 가는 법
공항입구에서 ‘중문, 한림, 신제주’ 방면으로 우회전 - 공항로 - 신제주입구에서 ‘성산, 시청’ 방면으로 좌회전 - 서광로 - 국립박물관사거리에서 ‘표선, 봉개동’ 방면으로 우회전 - 번영로 - 대천동사거리에서 ‘산굼부리’ 방면으로 우회전 - 비자림로 - 제동목장입구에서 ‘가시, 정석비행장’ 방면으로 좌회전 - 녹산로 - 유채꽃 프라자 표지판 보고 좌회전
[주요 스팟 내비게이션 정보]
큰사슴이오름: 검색어 ‘유채꽃프라자’, ‘대록산’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녹산로 464-65
조랑말체험공원: 검색어 ‘조랑말체험공원’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3149-33
조랑말 체험공원
문의: 064-787-0960
영업시간: 오전 9시 30분 ~ 오후 6시 (동절기 오후 5시까지)
매주 수요일 휴관. 조랑말승마장은 연중 무휴
조랑말박물관: 성인 2000원 / 청소년, 군인, 어린이, 노인, 국가유공자 1500원
조랑말 승마장: 근거리초원+트랙 1만2000원 / 목장산책+트랙 5만원
말똥쿠키만들기: 1만원
● 음식
우진해장국: 고사리 육개장이 독보적인 식당이다. 지난해 방송에 소개된 후 줄이 길어졌고 차츰 다른 지역에도 고사리 육개장을 하는 집들이 생기고 있다.
제주육개장(고사리육개장) 7000원 / 몸국 7000원 / 녹두빈대떡 1만3000원 / 사골해장국 7000원
064-757-3393 / 제주 제주시 서사로 11
광동식당: 두루치기를 주문하면 커다란 양푼에 양념된 흑돼지고기가 나온다. 원하는 만큼 팬에 덜어 올리면 함께 볶을 야채 그릇이 나온다. 가격은 단 6000원. "이렇게 장사해도 돼요?" 손님들이 오히려 걱정해 주는 식당이다. 생고기구이도 맛이 좋다.
흑돼지두루치기 6000원 / 생모듬구이 7000원 / 순대 1만원
064-787-2843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세성로 272
● 숙박
체크인호텔: 지난 겨울에 오픈한 후 여행자들에게 빠르게 입소문이 나고 있다. 숙면을 위해 타퍼를 올린 침대와 탑동바다가 보이는 전망, 깔끔한 인테리어로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기본에 충실한 숙소다.
064-725-4063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임항로 28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3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