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발 기업구조조정이 정·재계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1차 타깃은 정부 구조조정 협의체가 경기민감업종으로 분류한 조선·해운이다. 정부는 부채가 과도해 자칫 금융부실로 이어질 수 있는 기업들을 늦기 전에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글로벌 업황 부진과 공급과잉 여파로 천문학적 규모의 적자를 기록 중인 업체들도 어떤 식으로든 재편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대의’에는 이견이 없는 셈이다. 다만 방법론에선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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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정부 구조조정 협의체’ 회의에 참석한 임종룡 금융위원장. /사진=뉴스1 DB |
◆경기민감업종에 집중
지난달 26일 정부 구조조정 협의체는 조선·해운 2개 업종을 중심으로 기업구조조정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말 5대 취약업종으로 지정했던 ▲조선 ▲해운 ▲건설 ▲철강 ▲석유화학 중 조선·해운을 경기민감업종, 건설을 부실징후업종, 철강·석유화학을 공급과잉 업종으로 재분류하며 구조조정이 가장 시급한 경기민감업종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 급한 불부터 끄겠다는 계획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이날 서울 중구 금융위원회에서 열린 ‘제3차 산업경쟁력 강화 및 구조조정협의체’ 회의 후 “대우조선해양, STX 등 정상화를 추진 중인 조선사들은 기존에 수립한 경영정상화방안을 충실히 이행 중이지만 유가하락, 해상물동량 감소 등으로 인한 세계 선박발주량 감소로 경영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다”며 “경기민감업종인 조선·해운 2개 업종의 구조조정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대상선과 한진해운도 그간 경영정상화를 위해 상당한 자구노력을 했지만 글로벌 운임하락 요인 등 지속적으로 경영상황이 악화되고 세계해운업계동맹 재편 움직임으로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다”고 덧붙였다.
정부에 따르면 구조조정은 크게 세 갈래로 추진된다. 1트랙은 경기민감업종의 구조조정이다. 여기에 속한 조선·해운은 범정부 협의체가 구조조정 방향을 수립하고 이를 기초로 채권단이 개별기업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2트랙은 부실징후기업에 대한 상시구조조정이다. 건설업종은 주채무계열 및 개별기업에 대한 채권단의 신용위험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경영정상화 또는 신속한 정리를 추진할 방침이다. 이와 관련해 금융감독원과 채권은행들은 오는 7월 대출 규모 500억원 이상 기업 2000여곳의 신용위험 평가를 거쳐 워크아웃 대상인 C등급과 법정관리 대상인 D등급 규모를 발표할 계획이다.
3트랙은 공급과잉업종에 대한 구조조정으로 지난 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기업활력제고법에 의거해 개별기업이 자발적으로 인수합병(M&A), 설비감축 등 구조조정 계획을 수립하면 이를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정부는 대우조선해양·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 등 조선3사의 ‘빅딜’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임 위원장은 “소유주가 있는 대형기업을 상대로 기업 간 자율이 아닌 정부 주도로 합병을 강제하거나 사업부문 간 통폐합 등 소위 빅딜을 추진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한 방법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산업은행 소유인 대우조선에게는 인력 감축과 급여체계 개편 등의 추가 자구계획 수립을 요구하는 한편 현대·삼성중공업에 대해선 주채권은행이 선제적 채권관리 차원에서 자구계획을 받고 계획 이행 여부를 점검할 예정이다.
일각에서 제기된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합병설에 대해서도 정부는 부정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임 위원장은 “지금 합병을 논의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뿐만 아니라 적절하지도 않다”며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의 경영정상화 방안이 어느 정도 가닥을 잡게 되면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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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이미지투데이 |
◆지지부진 자율협약…조선·해운 풍전등화
이 같은 정부 방침에 조선·해운업계는 일단 안도하는 분위기다. 그간 1997년 외환위기 당시와 같이 정부 주도로 기업 간 합병이나 특정 사업 부문 매각을 종용받을 것이라는 설이 난무하며 혼란에 빠져있던 상황에서 벗어나 자체적 구조조정에 전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정부의 구조조정안에서 합병, 법정관리 등 최악의 방안이 빠져 다행”이라면서도 “아직 밑그림 수준이기 때문에 구체적 진행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사정이 변하면 국적 선사도 줄이거나 늘릴 수 있다”며 “채권단 중심 정리가 원활하지 않으면 정부가 개입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놨다. 또한 서울중앙지법 파산부도 지난달 28일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신청을 가정해 회생 감독을 맡은 주심 판사와 재판장을 잠정 내정하면서 구조조정 속도를 높일 것을 압박했다.
해운업계에선 현대상선·한진해운의 경영정상화 첫걸음인 용선료(선박 사용료) 인하 협상이 실패하면 결국 법정관리에 돌입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앞서 이들은 해운 경기가 활황이던 2010년 고가의 용선 계약을 맺었는데 이후 해운업황이 나빠지며 최근 몇년간은 배를 띄우면 띄울수록 적자가 커지는 악순환에 빠졌다. 이에 채권단은 양대 해운사가 해외선주들과 협상을 통해 용선료를 평균 30%가량 깎아야 회생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채권단 한 관계자는 “7월까지 용선료 인하 협상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법정관리로 보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재계 한 관계자는 “부실기업 구조조정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현재 조선·해운산업이 처해있는 문제가 내부의 문제인지 세계 경기둔화 탓인지는 따져봐야 한다”며 “정부가 종용하는 인위적 구조조정은 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는데 개별기업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조선·해운업종은 대규모 인력이 연관된 만큼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조 반발과 구조조정 이후의 대량 실업사태에 대한 명확한 대책이 필요하다”며 “정부가 총대를 메며 구조조정 작업에 착수하기에는 수월해졌지만 도중에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자율에만 맡길 게 아니라 적극적 지원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3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