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임종룡 금융위원장 주재로 열린 ‘제1차 산업경쟁력 강화 및 구조조정 협의체 회의’에서 조선과 해운, 건설·철강·석유화학분야를 이른바 ‘5대 취약업종’으로 규정한 지 1년이 지났다. 하지만 총선과 대우조선해양 비리수사 등으로 구조조정의 속도는 지지부진하다.

지난달 말 열린 제5차 산업경쟁력 강화회의에서 추가적인 구조조정 방안이 나올 것이란 기대가 많았지만 정부는 아무런 방안도 내놓지 않았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조선·해운업 산업구조 개편과 경쟁력 강화방안을 구체화해 이달 중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5차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 /사진=뉴시스 DB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5차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 /사진=뉴시스 DB

◆해운에만 날 선 칼날, 조선에는 솜방망이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은 사실상 세계경제의 저성장 기조가 본격화된 2008년부터 지속됐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나라 조선·해운업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구조조정이 성공적이었다고 보는 시각은 전무하다.


최근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08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대기업 11개, 중소기업 15개, 총 26개의 조선·해운사가 자율협약 및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하지만 이 중 워크아웃을 정상적으로 졸업한 기업은 1개사에 불과했다. 나머지 14개 기업은 파산, 회생절차, MOU약정 불이행 등으로 워크아웃을 중단했다. 사실상 절반의 기업이 구조조정에 실패한 셈이다.

채 의원은 채권금융기관이 이들 26개 조선·해운사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총 20조7602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추가 지원했다고 분석했다. 이 회사들이 구조조정에 들어가기 직전의 익스포저 총 금액 17조9408억원보다 더 많은 수준이다.

지난해 시작된 본격적인 구조조정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특히 지난해 발발한 조선 3사의 ‘해양플랜트 쇼크’와 대우조선해양 비리수사에서 밝혀진 총체적 난국은 더욱 강력한 구조조정이 필요함을 모두에게 일깨웠다.


하지만 지난 1년간 정부는 구조조정의 날 선 칼날을 유독 해운업계에만 들이댔다. 1위 해운사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로 향했고 현대상선은 산업은행이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채권단 관리회사가 됐다. 지난해부터 돌던 ‘정부가 양대 해운사를 합치려 한다’는 소문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정부의 계획적인 조정이었음이 기정사실로 여겨진다.

반면 해운보다 부실 규모가 크고 미래전망이 더욱 어두운 조선업계의 구조조정에는 유난히 무딘 모습을 보였다. 당장 채권단이 수조원을 쏟아붓고도 부채비율이 4000%가 넘는 대우조선해양은 해운업에 들이댄 구조조정의 ‘원칙’에 따르면 진작에 청산됐어야 하지만 추가자금이 더 투입됐다.

정부가 대우조선해양에 ‘원칙’을 곧이곧대로 들이대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파장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국회에서 열린 조선·해운업 구조조정 청문회에서 “대우조선해양이 부도에 이르렀다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일시에 13조원의 손실을 입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노동력 밀집 산업인 조선업의 특성으로 인한 대규모 실업 발생 부담도 크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정치권에서는 당장 불어닥칠 책임론이 두려워 밑 빠진 조선업에 계속 물을 붓는 상황”이라며 “책임론을 감수하고 한시라도 빨리 강력한 구조조정을 추진하지 않으면 결국 폭탄이 터졌을 때 국민에게 돌아올 피해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제5차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는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진=뉴시스 DB
제5차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는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진=뉴시스 DB

◆해운 구조조정, 반면교사 삼아야
이에 이달 중 발표될 방안에 어떤 내용이 실릴지 관심이 집중된다.

먼저 조선업이 기존 3사 체제를 유지할지 여부가 관건이다. 대우조선을 청산하고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2사 체제로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지만 업계는 당장 3사 체제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현재로서는 대우조선해양의 부도로 인한 파장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

조선업 체제개편은 제출이 지연되는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의 보고서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동걸 산업은행장은 지난 4일 국회 정무위 국정감사에서 “맥킨지의 보고서가 일반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일반적인 수준이라는 말은 조선업계의 반발이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며 “사실상 2사 체제개편 등의 방안은 실리지 않았다고 보고있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원톱체제로 개편된 해운업에서는 현대상선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남은 해운사들의 포지셔닝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지가 주요 쟁점이다. 한진해운을 존속시킬 것인지, 혹은 청산할 것인지의 밑그림도 나와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현대상선의 경쟁력 강화방안은 기존 한진해운이 가진 유·무형 알짜자산을 흡수하는 방식이 될 것으로 업계는 전망한다. 현대상선은 최근 한진해운발 물류대란으로 대체선박을 투입했던 미주노선을 정기노선으로 서비스하기로 했다. 한진해운의 주력노선이었던 곳이다.

다만 지속적인 구조조정으로 우량자산 매각을 진행해온 한진해운에 ‘알짜’라고 할만한 유형자산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미지수다. 선로 등 무형자산의 경우 해외선사들과 나눠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머스크를 비롯한 선사들이 미주노선에 속속 진출하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한진해운의 존속 여부도 관심이다. 사실상 청산 수순을 밟는 것으로 보이지만 주력노선인 미주 영업망을 매각하고 아시아노선만 유지하는 방안도 고려대상이다.

재계 관계자는 “한진해운을 법정관리에 보내기 전에 물류대란 대비와 유·무형 자산을 국적 선사에 보전할 수 있는 방안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한심하다”면서 “앞으로 진행될 다른 업종의 구조조정 과정에선 원칙을 고수하고 업종의 특성을 고려한 사전작업을 병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5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