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간 5건, 실효성 논란… 개미 위해 활성화돼야
주식시장에서는 기관과 외국인의 등쌀에 개미투자자의 허리가 휘는 경우가 다반사다. 정보와 자본의 격차에서 발생하는 분쟁도 이 중 하나다. 개미가 힘을 쓰려면 뭉쳐야 한다. 하지만 유일한 개미의 칼인 ‘증권집단소송제’가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최근 다수의 상장사가 분식회계나 늑장공시 등으로 시장에 혼란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소액주주를 효과적으로 보호하려면 증권집단소송제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
◆증권집단소송제 실효성 논란
집단소송제는 회사나 특정인의 행위로 다수가 피해를 입었을 경우 피해자 중 한사람 이상이 대표로 소송을 진행할 수 있는 제도다. 여기서 대표피해자가 승소하면 소송에 반대했던 피해자를 제외한 나머지 투자자 모두 똑같이 보상받는다. 다만 우리나라는 집단소송제가 증권분야로 제한됐다. 소액투자자의 일방적인 피해를 유발하는 증권관련 부정행위를 저지른 기업에 책임을 묻겠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하지만 2005년 제도가 처음 시행된 이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내에서 집단소송 허가를 받기 위한 소송은 9건에 불과하다. 이 중 집단소송 허가를 받고 본래 안건의 소송에 들어간 것은 5건이다. 현재 본안 소송이 진행 중인 사건 중 하나는 지난 3월 양모씨(61) 등이 ELS(주가연계증권)에 투자했다가 시세조종행위로 피해를 입었다며 로열뱅크오브캐나다(RBC)를 상대로 낸 집단소송이다.
양씨를 포함한 437명은 2008년 4월 한화증권이 발행한 기초자산 SK보통주, 포스코의 ELS 상품에 총 68억7600만원을 투자했다. 하지만 한화증권과 ‘백투백 헤지’(위험회피) 계약을 맺은 RBC가 만기상환 기준일에 SK보통주를 마감 10분 전 대량매도하며 주가를 떨어뜨려 만기상환조건을 벗어나게 만들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후 금융감독원이 ‘수익률 조작이 의심된다’고 결론 내렸고 양씨 등은 이를 근거로 집단소송 허가신청을 냈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지난 11월4일 대법원에서 집단소송 허가결정이 확정된 ‘씨모텍’ 건이다. 소송을 제기한 이모씨(45) 등 185명은 씨모텍이 2011년 유상증자로 286억원의 자금을 조달했을 당시 주관사이던 동부증권이 투자설명서와 증권신고서를 거짓 기재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씨모텍은 유상증자 후 3개월도 안돼 감사 의견거절을 받았고 결국 상장폐지됐다.
RBC나 씨모텍 같은 사건들이 종종 일어나지만 11년간 불과 5건만 본안소송에 들어간 것은 과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먼저 집단소송을 제기하려면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더라도 피고가 즉시 항고하면 본안소송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3심까지 가서 대법원의 허가를 받는다. 집단소송 허가는 본안소송에 들어가기 전부터 평균 5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RBC건의 최초 소 제기일은 2010년이고 씨모텍 건도 2011년이다. 본안소송이 3심까지 진행된다면 앞으로 실제 판결이 나올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예측하기 어렵다. 또 집단소송의 대상이 증권신고서, 투자설명서, 사업보고서의 허위기재 및 공시, 미공개정보이용행위, 시세조종행위 등에 따른 손해배상으로 한정돼 한미약품의 ‘늑장공시’ 같은 사건은 대응하기 힘든 단점이 있다.
◆개미투자자 위한 집단소송 개정
증권집단소송이 활발하게 이뤄지지 못한 원인은 제도도입을 논의할 때부터 기업들의 반발에 부딪혀 제한사항을 많이 넣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기업들은 집단소송을 허용하면 멀쩡한 기업도 과도한 소송에 시달려 결국 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작성된 증권집단소송 연구논문에 따르면 합의금 액수가 주가하락 금액의 일정비율로 결정되면 결국 투자자들이 주가가 하락할 때마다 일정부분을 배상받는 일종의 보험 역할을 한다. 이 경우 회사의 자본조달비용이 높아지고 자본의 수익률은 낮아진다. 이런 이유로 집단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청구원인과 자격이 한정됐고 증권집단소송제도가 유명무실해졌다는 지적이다.
미국 민사소송컨설팅회사인 코너스톤 리서치와 스탠포드 법과대학의 공동발표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법적 제한이 낮은 미국의 경우 집단소송 건수가 지난해에만 189건으로 집계됐다. 우리나라에 집단소송제가 도입된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미국의 소송건수는 1724건이다. 지난해 말 기준 전체 미국증시 상장사가 3800개로 한국의 2000개보다 두배가량 많은 점을 감안하더라도 집단소송비율이 큰 차이를 보이는 셈이다.
이에 따라 한국도 증권집단소송 제기요건을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은 지난 8월 현행 집단소송법안에 소송남용을 막기 위한 명목으로 제동을 거는 장치가 많다며 증권관련 집단소송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개정안은 ‘3년간 3건’이던 대표당사자·소송대리인 요건을 삭제했다. 국내에서는 전문소송꾼이 등장할 가능성이 낮다고 본 것이다.
손해배상의 대상이 되는 위반행위도 공개매수신고서와 주요사항보고서의 허위기재까지 확대했다. 아울러 법원이 필요한 경우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에 기록의 제출·송부를 요구할 수 있고 기관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를 거부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지금까지는 실제 사건 관련증거가 기업이나 기관에 편재했음에도 이들은 정보공개를 관행적으로 거절했다.
또 소송 장기화의 주범으로 지목된 ‘즉시항고제’도 개선했다. 소송허가결정에 대해 피고가 불복해도 법원에서 별도의 중지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본안소송을 개시할 수 있게 했다. 실제 소송을 진행하기까지 몇년씩 걸리던 것이 상당부분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증권집단소송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시장을 시끄럽게 했던 한미약품 공매도 사건의 집단소송도 좋은 결과를 기대할 만하다.
채이배 의원은 “한미약품은 미공개정보 이용이나 시세조종 등의 구체적 혐의가 확인되지 않는 한 현행법상 집단소송으로 피해를 보상받기 어렵다”며 “수시공시 역시 사업보고서 및 분반기보고서와 마찬가지로 허위·부실공시에 대해 집단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6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