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정치권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가운데 재계 시계는 오히려 멈췄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직·간접 연루된 대기업을 중심으로 연말 인사 및 새해 경영구상 등에 차질이 빚어지는 분위기다. 다만 게이트 연루 정도에 따라 기업별로 미묘한 온도차가 감지된다. 탄핵 정국 속 4대그룹의 속사정을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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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수사를 맡은 특별검사팀의 박영수 특검(가운데). /사진=뉴스1 DB |
◆국가 리더십 부재, 경제 불확실성↑
지난 9일 박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후 재계는 비상회의 등을 통해 국가 리더십 부재에 따른 대응책 마련을 고심 중이다.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에서 중요한 경제정책이 힘있게 추진될 가능성이 낮고 정책의 불확실성도 커졌기 때문이다.
경제 불확실성의 시대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이 나오기까지는 최장 6개월이 걸린다. 결과에 따라 조기 대선 국면으로의 전환이나 식물 대통령의 자리보존이 결정되는데 어느 쪽이든 기업 경영에는 악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번 게이트의 자금 제공자로 주요 대기업들이 지목된 만큼 관련된 대기업 총수들은 검찰 조사와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 출석에 이어 특별검사 수사까지 앞두고 있다. 따라서 일부 기업은 매년 연말 단행하던 사장·임원 인사를 무기한 연기했고 내년 경영계획 수립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총수의 역할이 절대적인 국내 대기업 특성상 총수가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돼 사법당국의 수사를 받으면 경영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는 게 재계의 대체적 분석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미국 기준금리 인상,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 글로벌 경영환경이 대격변의 시기로 접어들었지만 국내 정·재계는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대경제연구원 관계자는 “내수 경기 부진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치 불확실성이 정책 불확실성으로 옮겨가는 국면에서 현재의 불황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탄핵 이후 국정 컨트롤타워의 부재로 정책의 적시성과 효율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정부가 일관성 있는 정책을 추진해 경제 불확실성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며 “각 기업이 아무리 대비를 잘한다고 해도 예측 가능한 정부의 경제정책이 추진되지 않으면 허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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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사진=사진공동취재단 |
다만 주요 기업의 상황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재계 서열 1위 삼성그룹은 이번 게이트의 직격탄을 맞아 주요 경영 계획이 줄줄이 연기됐다. 매년 12월 초 단행하던 사장·임원 인사는 특검 수사가 끝나는 내년 2월 이후로 연기될 전망이며 내년 사업계획 구상도 늦춰지고 있다.
핵심계열사인 삼성전자의 글로벌 전략회의를 제외한 그룹의 주요 행사는 모두 무기한 연기됐다. 반기마다 한번씩 진행되는 글로벌 전략회의는 그간의 성과를 확인하고 앞으로의 경영전략을 논의하는 자리다. 하지만 내년 사업을 이끌 사람들에 대한 인사가 정해지지 않아 예년과 달리 구체적 결과물이 나오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부서장이나 사장이 내년에도 계속 보직을 유지하는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열심히 일할 분위기가 아니다”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데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만큼 정상적 경영이 이뤄지기 힘든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이 해체를 언급한 그룹의 컨트롤타워 미래전략실은 국조가 끝나고 바로 특검으로 이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인사나 새로운 경영계획보다는 특검 대비에 몰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이트 연루 정도 따라 행보 제각각
현대자동차그룹은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은 편이다. 현대차는 예년처럼 올 연말까지 사장·임원 인사와 내년 사업계획 구상을 마무리 지을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 사업계획은 매년 연말 진행하던 해외법인장 회의와 글로벌 전략회의를 통해 확정할 예정이다. 하지만 현대차도 이번 게이트 관련 특검 수사를 받을 가능성이 있어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는 처지다.
검찰에 따르면 현대차는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 최순실씨가 실소유주인 광고회사 플레이그라운드에 올해 5∼9월 13억원의 광고를 몰아줬다. 또 최씨의 지인이 운영하는 KD코퍼레이션과 정상적인 절차를 생략한 채 수의계약을 체결하고 지난 9월까지 10억6000만원 상당의 부품을 납품받았다.
현대차 관계자는 “정치적 상황과 별개로 생산과 판매 등 기업 활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임직원 모두가 묵묵히 자신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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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사진=사진공동취재단 |
SK그룹은 특검에 대비하면서도 인사와 내년 사업계획 구상 등의 경영활동은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다. 전경련이 주요 기업의 매출별로 액수를 나눠 자금 출연을 요청해 미르·K스포츠재단에 지원한 111억원 외에 추가 출연 요구를 거절한 만큼 상대적으로 특검 수사에도 느긋한 편이다.
SK 관계자는 “탄핵 정국과 특검 수사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면서도 “경영활동과 관련해선 외부 상황과 무관하게 묵묵히 예정대로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LG그룹은 이달 초 인사와 조직개편 등 내부정비 작업을 마친 만큼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가장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각 계열사별로 내년 사업계획 수립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며 투자나 고용은 국내외 경기상황, 탄핵 정국 변수 등을 고려해 탄력적으로 대응할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한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도가 떨어지는 LG는 매년 하던 대로 경영이 이뤄지고 있다”며 “지난달 열린 계열사 업적보고회를 통해 올해 사업실적 점검 및 내년 경영계획 보고도 마친 만큼 안정적으로 미래를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6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