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공단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섰다.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 일가 등의 ‘뇌물죄’ 적용을 위한 핵심 키로 주목받고 있어서다. 게이트를 수사 중인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삼성그룹의 로비를 받은 비선실세가 청와대를 움직여 국민연금이 지난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을 찬성토록 종용한 것으로 의심한다. 국민 노후를 위한 최후의 보루인 국민연금이 권력을 쥔 자들의 놀이터로 전락했다는 의혹을 받는 셈이다. 국민연금 측은 “외압이 작용하기 힘든 시스템이 구축돼 그럴 리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의혹은 오히려 더 커지는 모양새다.
◆‘정권 입맛 따라’ 외압에 휘둘린 흔적들
제1대 장원찬 이사장부터 제15대 문형표 이사장에 이르기까지 역대 국민연금 수장 중 임기 3년을 온전히 채운 인사는 단 세명(4·9·13대)에 불과했다. 중도 하차한 비율이 80%에 이르는 점과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이라는 특성상 복지부 장관의 제청 후 대통령이 이사장을 임명하는 점 등을 감안하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인사가 좌우된 정황으로 해석된다.
실제 역대 이사장 중 6대 최선정, 8대 차흥봉, 11대 김호식, 14대 최광, 15대 문형표 등 5명은 국민연금 이사장직을 전후해 복지부, 해양수산부, 노동부 장관 등을 지냈다. 특히 최광 전 이사장은 박근혜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5월 취임했으나 핵심보직인 기금운용본부장 인사문제 등을 놓고 복지부와 갈등을 빚다 임기 7개월을 남기고 중도 사임했다.
당시 최 이사장은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찬성을 이끌어 낸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과 기금운용본부 독립 추진안을 놓고 갈등을 빚다 임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홍 본부장의 연임 불가를 통보했다. 이에 홍 본부장의 연임을 원했던 복지부는 협의 절차가 없었다며 최 이사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결국 최 이사장은 복지부가 국민연금 운영실태 점검계획 발표 등 압박의 수위를 점차 높이자 논란이 불거진 지 2주 만인 지난해 10월27일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부는 즉각 사직서를 수리하고 이례적으로 빠른 절차를 통해 두달 만에 문 이사장을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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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국조특위에 출석한 문형표 이사장. /사진=뉴스1 손형주 기자 |
공공기관장에 대한 인사는 통상 공고기간만 2~3주, 서류심사와 면접심사는 20일 이상 걸린다. 이와 별도로 내부 이사회와 후보추천위원회의 검토, 상부보고 등으로 1주일가량이 소요된다. 하지만 문 이사장 선임 당시 실제 공모 기간은 7일에 불과했고 단 3명만 응모한 가운데 27일 만에 공고부터 임용까지 모두 마무리됐다.
이에 대해 김경진 국민의당 의원(최순실 국정조사 특위위원)은 “문형표 이사장의 임명은 삼성의 기업합병(제일모직-삼성물산) 성사에 대한 청와대의 보은인사”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기준 512조원의 천문학적 기금을 운용하는 공공기관의 수장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통상적인 관례보다 빠른 결정을 내린 것은 외압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다는 게 김 의원의 주장이다.
특히 문 이사장은 메르스 사태로 38명이 숨진 책임을 지고 복지부 장관직에서 불명예 퇴진한 지 4개월 만에 면접점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국민연금 이사장으로 임명됐다.
이와 관련 복지부, 국민연금 내부 관계자로부터 문 이사장이 삼성물산 합병 당시 의결권을 논의하는 전문위원에게 전화를 걸어 일종의 압력을 행사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또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이 문 이사장과 호흡을 맞춰 이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주장도 제기된 상태다.
청와대와 국민연금 측은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어떤 지시도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검찰은 국민연금,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압수수색에 이은 관련자 소환조사로 수사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에 어떤 간섭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며 “일부 언론에서 제기한 ‘합병 찬성 압력 의혹’ 등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수상한 전·현직 기금운용본부장
인사의혹은 기금운용본부장으로도 번지고 있다. 지난해 삼성물산 합병 당시 기금운용을 책임졌던 홍완선 전 본부장은 박근혜정부의 핵심 친박(친박근혜)으로 분류되는 최경환 의원과 대구고 동기동창이다. 또 올 초 새롭게 본부장에 임명된 강면욱 본부장은 이번 게이트에서 행동대장 역할을 맡았던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계성고·성균관대 1년 후배다.
인선과정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입수한 2013년 말 본부장 공모 당시 ‘지원자별 경력점수 산정표’에 따르면 홍 전 본부장은 서류심사단계인 경력점수 평가에서 60점 만점에 43.43점을 받아 지원자 22명 중 8위에 그쳤다.
또 오제세 더민주 의원이 확보한 ‘지원자별 경력점수 산정표’에 따르면 강 본부장은 경력점수 평가에서 18명 중 9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두 인사 모두 면접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본부장에 임명됐다. 정권발 낙하산 논란이 제기되는 이유다.
세계 3위 연기금인 국민연금 기금운용을 총괄하는 기금운용본부장은 정권 입장에서 중요한 자리다. 국민연금은 기금의 30% 이상을 주식에 투자하며 여러 대기업의 최대주주에 올라 자본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 관계자는 “기금운용본부장은 공개채용절차를 거쳐 기금이사추천위원회의 서류·면접심사와 전문조사기관의 경력 및 평판조회 등 엄격한 심사로 선정된다”며 “사용자대표(경총·전경련), 근로자대표(한국노총·민주노총), 지역가입자 대표(변호·소비자단체) 및 당연직 이사로 구성된 7명이 엄격한 후보자 검증을 진행해 선정한다”고 해명했다.
이어 “경력점수는 외부전문가가 업계 경력을 점수로 환산한 심사위원 참고자료로 최종 면접대상은 심사위원간 협의를 통해 결정한 것으로 안다”며 “사업계획서나 직무계획서 등을 종합적으로 놓고 심사한 결과 기금운용본부장을 임명했다”고 덧붙였다. 탄탄한 시스템이 구축돼 있고 외압도 없었다는 해명이다.
하지만 야권 관계자는 “국민연금은 노인 빈곤율이 높은 한국사회에서 노년층의 안정적 삶을 위한 최후의 보루 성격이 강한데 본래 목적이 아닌 정치적 논리나 특정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기금을 굴린 것은 국민의 미래를 위해 맡긴 혈세를 낭비한 심각한 문제”라며 “검찰이나 특검수사를 통해 국민연금에 가해진 외압의 전모를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사태를 거치며 국민연금기금을 운용하는 고급인력이 줄줄이 퇴사해 인력난이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기금운용본부에서 주식, 채권, 인프라 운용 등을 책임지던 팀장급 인사 5명이 잇달아 사표를 제출했고 이들을 포함해 올해에만 기금운용인력 20여명이 국민연금을 떠났다. 이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기금운용본부가 올 들어 세번째 인력 모집에 나섰지만 눈에 차는 전문가를 모집하는 데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6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