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 없어 한산한 낙원상가 내부. /사진=김창성 기자
손님이 없어 한산한 낙원상가 내부. /사진=김창성 기자
경기 침체 속 불황 직격탄… 곳곳에 품은 옛 추억은 그대로
건물 곳곳에서 올드팝송이 울려 퍼진다. 지하 재래시장에서는 구수한 잔치국수를 먹는 손님들이 담소를 나누고 건물 윗층 실버극장에서는 어르신들의 추억이 상영된다. 최근 찾은 악기천국 서울 낙원상가는 대체로 차분했다. 시대를 풍미하던 통기타 가수와 음악 좀 한다는 멋쟁이들이 몰려 한 때 호황을 이뤘던 낙원상가. 멋스런 악기연주를 컴퓨터가 대신해 주는 시대가 오고 경기불황까지 겹치며 언제부터인가 오가는 사람 없이 쓸쓸해진 낙원상가에서 여전히 음악과 추억을 지키는 사람들을 만났다.

◆무료한 일상을 깨우는 경쾌한 악기소리


“악기를 팔아본 게 언제인가 싶어요. 요샌 구경도 잘 안 오는 것 같습니다.”

낙원상가 2층에서 기타가게를 운영하는 이세문씨의 하소연이다. 예고 없이 찾아가 말을 건넸지만 TV를 보고 있던 그는 스스럼없이 돌아서 낙원상가의 근황을 담담하게 들려줬다. 나지막한 음성이었지만 그가 겪은 일상의 무료함은 꽤 또렷했다.

그는 이곳에서 30년 가까이 기타를 팔고 고친 기타장인이다. 신중현·김태원 등 국내 내로라하는 기타연주자들도 그를 찾아 기타 수리를 맡긴다고 한다. 긴 시간 기타를 만지며 상가의 희로애락을 무던히 봐온 이씨지만 최근의 경기불황은 그를 한숨짓게 한다.


이씨가 일하는 2층은 주로 통기타·키보드·음향기기·현악기 등을 취급한다. 곳곳에서 통기타나 바이올린 등 악기 튜닝 소리가 들리고 점검 중인 듯한 음향기기의 거친 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꽤 익숙한 올드팝송이 들리자 나도 모르게 같이 흥얼거리기도 했다.

낙원상가를 찾은 노인들이 불 꺼진 아코디언 가게 앞에서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사진=김창성 기자
낙원상가를 찾은 노인들이 불 꺼진 아코디언 가게 앞에서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사진=김창성 기자

귓가를 자극하는 악기·음악소리와 셀 수 없이 많은 악기가 눈에 들어온 반면 손님은 별로 없었다. 몇몇 사람의 웅성거림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상가 전체를 감싸기엔 역부족이었다. 긴 복도를 따라 양 옆으로 각종 악기점이 즐비했지만 오가는 손님이 거의 없어 꽤 적막했다.
“유명 가수도 와서 기타를 사고 고치던 곳이에요. 그렇게 매일 사람들로 북적이던 곳인데 장사가 안돼 이곳을 떠나는 분들을 보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추억을 상영하는 낙원상가

이씨의 먹먹함을 뒤로한 채 3층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주로 드럼·전자기타·색소폰·아코디언 등을 팔고 있었다. 2층과 마찬가지로 셀 수 없이 많은 악기가 눈에 들어왔지만 역시 입구부터 적막감이 감돌았다. 어림잡아 50m쯤 되 보이는 긴 복도에 가게 주인과 손님 서너 명이 서성이는 모습 외엔 이렇다 할 북적거림이 없었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가게를 둘러봤지만 안에 들어갈 엄두는 못 냈다. 악기를 다루지도 못하거니와 사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주인에게 민폐를 끼칠 것 같았다.

그렇게 걷다가 복도 끝에 다다르자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두 분과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불 꺼진 아코디언 가게 앞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정겨워 보여 가까이 다가가자 아코디언으로 한 가닥 했던 젊은 시절 얘기를 무용담처럼 주고받고 있었다.

4층에 오르자 한 때 종로 일대 영화판을 주름잡던 허리우드 극장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대형 멀티플렉스 상영관에 밀려 '실버영화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추억의 옛 영화만 상영한다.

낙원상가 4층에 자리한 허리우드 극장에 낭만인이 몰렸다. /사진=김창성 기자
낙원상가 4층에 자리한 허리우드 극장에 낭만인이 몰렸다. /사진=김창성 기자

작은 매표소에는 '낭만인(50세 이상) 3000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정겨움을 더했고 곳곳에 붙은 옛 명작영화 포스터는 이곳을 찾는 낭만인들의 추억이 무언지 가늠케 했다.
평일이었지만 극장 안은 영화를 기다리는 낭만인이 가득 찼다. 단돈 3000원으로 추억에 젖어든 이들의 활기찬 모습은 침체된 낙원상가를 지탱하는 한 축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시골 5일장을 옮긴 듯한 지하시장

그늘진 일상과 추억이 공존하는 낙원상가를 내려와 지하시장으로 향했다. 지하시장은 흡사 차량이 드나드는 지하주차장 같이 생긴 경사진 도로를 지나야 마주할 수 있다.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골 5일장에 온 듯 한 풍경이 들어왔다. 침체돼 보였던 윗층 악기상가와 달리 생기가 넘쳤다.

다소 미끄럽고 투박한 시멘트 바닥을 조심스레 지나자 곧바로 잔치국수와 떡만둣국을 정신없이 흡입하는 ‘아재’들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좁은 공간에 간이 의자와 식탁, 시원한 물 한잔에 겉절이가 전부였지만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표정을 지었다. 휴지로 연신 땀을 닦으면서도 입으로 향하는 젓가락질은 바삐 움직였다.

정겨운 시장의 단골손님인 파전에 도토리묵도 한 자리 차지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막걸리 안주로 열무김치 하나 올려놓은 식탁도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진수성찬 부럽지 않았다.

낙원상가 지하 재래시장 식당에서 사람들이 잔치국수를 먹고 있다. /사진=김창성 기자
낙원상가 지하 재래시장 식당에서 사람들이 잔치국수를 먹고 있다. /사진=김창성 기자

식당 너머에는 여느 시장과 다를 바 없는 정겨운 풍경이 들어왔다. 돼지고기를 썰고, 생선에 얼음을 붓고, 고추를 빻고, 사기그릇에 뭍은 먼지를 닦는 시장 상인들의 평범한 일상이 보였다. 가격 흥정을 하며 시장 분위기를 이끄는 화끈한 손님은 없었지만 지하시장 공기는 충분히 후끈거렸다.
복잡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예스러운 낙원상가는 지하시장부터 위층 악기상가까지 평범한 우리 일상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경기불황에 한숨짓는 상인, 단돈 3000원에 추억여행 하는 낭만인, 땀 한바가지 흘려도 잔치국수 한 그릇에 행복한 아재까지, 오늘도 낙원상가의 일상은 힘겹지만 훈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