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는 확실히 일본 본토와는 다른 분위기다. 이것은 단지 2차 대전 이후 미군의 점령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만의 풍토와 역사가 있어서다. 독립국이었던 작은 섬나라 류큐왕국의 흔적과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로코쿠몬에서 본 큐케이몬과 칸카이몬.
로코쿠몬에서 본 큐케이몬과 칸카이몬.

◆류큐왕국 속 조선의 흔적 
오키나와 슈리성터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큰 기대를 안고 가면 건물들이 너무 새 것이라 조금 실망할 수 있다. 엊그제 색칠한 듯 붉은 건물은 일본 본토와는 뭔가 다르다. 오히려 중국풍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선명한 색감 때문인지 ‘유구한 역사’도 느껴지지 않는다. 괜히 유네스코에 섭섭한 마음마저 들 때쯤,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이곳은 슈리성과 그 건물이 아니라 '터'가 문화유산이라는 점이다. 참 애매한 결정이다. 그래도 조금 호기심이 생긴다. 우리가 아는 일본과는 뭔가 다른 게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일대를 차근차근 둘러보기로 한다.

슈리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몇가지가 있는데 단체 여행자들은 주로 정문에 해당하는 슈레이몬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오키나와 현립 예술대학 앞으로 지나는 류탄 길도 좋다. 이 방향으로 들어갈 경우 처음 만나는 것이 왼쪽으로 엔각사총문과 방생교고 오른쪽으로 엔칸치연못이다. 연못은 류탄 연못과 이어졌는데, 슈리성의 빗물을 모으도록 설계된 것이라고 한다.


연못과 함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리 건너 오래된 집 하나다. 짙은 초록의 연못 위에 돌다리로 연결된 집이 꽤나 운치있다. 안내판을 보면 이곳이 조선과 관련된 곳이다. 원래는 조선 왕이 보낸 방책장경(고려판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1502년 이곳에 당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키나와 류큐왕국과 조선왕국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는 말이다.


[여행] 일본과는 또 다른 류큐왕국

실제로 몽골에 의해 고려에서 축출된 삼별초가 이곳 오키나와로 왔고 류큐왕국 건국에 도움을 줬다는 설이 학계에서 거론된다. 이것을 주장하는 학자가 방금 지나온 오키나와 현립 예술대학의 아사토 스스무 교수다. 1982년 우라소에서 발견됐다는 유물은 고려의 장인이 만들었다고 기록된 기와로, 우리나라 진도의 것과 한사람이 만든 것처럼 닮았다.
당집은 1609년 외부침략으로 파괴되고 고려판대장경도 분실됐다. 이후 1621년 당집을 새로 짓고 물의 신 벤자이텐을 모시면서 이름을 벤자이텐도우라고 부르게 됐다.

◆문으로 보는 류큐왕조 
슈리성은 여러번 파괴되고 재건됐다. 첫 기록이 1427년 정비기록인 것으로 보아 창건은 그 이전으로 여겨진다. 450년간 류큐왕조가 머물던 이 성은 왕위 쟁탈과 화재로 세번 소실됐고 2차 대전 때 완전히 파괴된다.

작고 힘이 약했던 류큐왕조는 1879년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패망했다. 이후 슈리성은 학교로 쓰이기도 했다. 2차 대전 때는 일본군 32군이 슈리성을 총사령부로 사용했고, 폭격을 피하려고 성 지하에 벙커를 만들었다. 미군은 이곳을 1945년 5월25일부터 사흘에 걸쳐 포격했고 이로 인해 류큐왕국의 보물과 문화재가 파괴됐다.


지금은 일본의 현이 됐지만 그 당시 일본은 이곳 사람들을 자국민으로 여겨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을까. 2차 대전 때 이 섬 사람들을 내몰아 자결을 강요했던 일을 떠올리면 짐작이 간다. 그러니 문화재는 말할 것도 없다. 성 아래에 참호를 만들었으니 최소한 성을 지키려는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타산지석(他山之石). 슈리성의 역사를 보며 국가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파괴됐던 슈리성은 1958년 슈레이몬 복원을 시작으로 하나씩 되살아난다. 슈레이몬은 오키나와의 상징으로 일본 지폐 2000엔권에도 그려져 있다. 슈레이몬의 이름은 ‘수례지방’(守禮之防)이라 쓰인 현판 때문인데, 이는 중국 황제로부터 받은 것이다. 류큐왕국이 예를 지키는 나라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중국 말을 잘 듣는다는 칭찬의 의미로 받은 것이겠다. 실제로 중국에서 책봉사들이 오면 류큐왕국의 귀족들이 이 문 앞으로 나와 황제의 사신에게 삼배구고두를 했다고 한다. 세번 절하고 땅에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으로, 조선의 인조가 병자호란 때 승복의 의미로 했던 그것이다. 약소국이었던 류큐왕조의 고군분투가 느껴진다.

대문격이었던 슈레이몬을 지나면 성벽과 연결된 문이 나온다. 칸카이몬은 그 첫번째로 석조 건축 위에 목조 성루가 올려져 있어 비로소 성에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문의 이름은 환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또한 중국 황제의 사자 ‘책봉사’ 등의 방문을 환영하는 의미다.


류히.
류히.

제2문인 즈이센몬에는 슈리성의 샘 ‘류히’가 있다. 여기 있는 용 조각은 1532년에 다쿠시 모라시토가 중국에서 가져온 것인데 슈리성터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문화재다. 샘은 왕실 사람들이 마시던 물이었고 중국 사신들이 ‘천수관’에 머물 때 이 물을 길어다 대접했다고 한다.
누각문인 로코쿠몬까지 가면 성을 거의 다 올라왔다. 이곳에는 물시계가 있어서 시간을 재고 북을 치면 양쪽 망루에서 이를 듣고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문 옆으로는 물시계를 보완하는 해시계가 있다. 귀족들이 여기서부터 가마를 내렸다고 하는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여기까지의 언덕과 계단을 가마를 타고 왔다는 뜻이겠다. 이런 귀족들이 저 앞에 있는 슈레이몬에서는 중국 사신에게 삼배구고두를 했다고 생각하니 약육강식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으로 여겨진다.

외곽을 지나면 내곽으로 들어가는 코후쿠몬을 만난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조금 다른 성격의 문 두개를 지난다. 소노한우타키이시몬과 스이무이우타키의 문이다. 이들은 출입을 위한 문이 아니라 성지로 향하는 문이다. 성 바깥에 있는 소노한우타키이시몬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성 터’만 문화유산이라는 애매함보다는 당당한 이유가 있다. 국왕이 외출할 때 신에게 안전을 기원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내곽으로 들어가는 코후쿠몬 앞에는 스이무이우타키가 있다. 슈리성은 성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명당’에 성이 지어진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열개의 우타키가 있었다는 게 이상할 것이 없다. 오키나와에는 많은 우타키가 있는데 그중 일곱개를 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스이무이우타키가 그중 하나다. 슈리성 내에서도 이것의 권위가 가장 높았다고 한다. 국왕이 성밖으로 나갈 때 신녀들이 이곳에 모여 국왕의 안녕을 비는 의식을 올렸다고 한다.

 

슈리성 성벽.
슈리성 성벽.

◆가까이 보는 왕의 공간과 멀리 보는 경관
내곽은 왕이 거처하며 정사를 살피던 곳이다. 정전인 세이덴은 3층 목조건물로 류큐왕국의 상징이기도 하다. 정전 안에는 국왕의 옥좌인 우사스카가 있고 그 뒤로 방이 있다. 이곳에서 국왕과 궁녀가 아침마다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했다고 한다.

정전 양쪽으로는 남전과 번소가 있다. 왕조시대 미술공예품 등이 전시됐다. 정전 뒷편으로 국왕의 일상 집무실이 있고, 왕자 대기실, 정원, 개인공간, 휴식장소 등이 있다. 책봉사를 환대했던 북전 역시 전시실로 꾸며져 책봉사 행렬도, 내곽 배치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정전 앞에서는 무용 공연을 볼 수 있다. 류큐 전통무용인데 한국어 해설도 있어 이해하기 쉽다. 요일과 시간이 정해져 있으므로 미리 체크하고 가면 다리도 쉴 겸 좋은 볼거리가 된다.

이왕 온 김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성에서 보는 전망이다. 이리노아자나의 전망대는 물론이고 쿄노우치 쪽으로 안내판을 따라 잠시 걸어보면 좋다. 쿄노우치 역시 슈리성의 숲이며 성지다. 성벽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짧지만 숲이 우거져 산책하는 기분이 들고 전망대에선 슈리성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로코쿠몬에서 보이는 전경이 슈리성 북쪽이라면 쿄노우치 쪽이 그 반대편, 이리노아자나가 서쪽이다.

 

전망대 가는 길.
전망대 가는 길.

[여행 정보]
한국에서 일본 오키나와 가는 법
한국에서 오키나와 나하 국제공항으로 가는 직항 비행기가 인천, 김해, 제주공항에 있다
나하공항에서 슈리성 가기: 공항에서 슈리성을 잇는 모노레일(유이레일)을 이용한다. (330엔)

환율: 100엔 = 약 1010원

슈리성
http://oki-park.jp/shurijo/ko/
정전 입장료: 어른 820엔 / 고등학생 620엔 / 초등학생 310엔
관람시간: 계절마다 다르므로 사이트를 참고한다. (정전은 오전 8시30분부터 입장 가능)
전통무용 공연: 수·금·토·일·공휴일에 1일 3회 공연 / 오전 11시·오후 2시·오후 4시

음식
슈리소바: 유명한 소바집으로 슈리성 가는 길에 있다. 오전 11시30분에 오픈해 재료가 떨어지면 문을 닫는데 보통 2시쯤이면 영업이 끝나므로 슈리성 관람시간을 전·후로 맞춰야 한다.
슈리소바 400~600엔 / 쥬시 200엔

숙박
호텔 오션: 국제거리에 있는 호텔로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 좋고 조식이 유명하다. 100여가지 메뉴를 뷔페식으로 맛볼 수 있고 즉석에서 요리해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많아 인기다.
주소: 2-4-8 Asato, Naha 902-0067 , Okinawa Prefecture
연락처: +81 98-863-2288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8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