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으로 고성능차시장이 열릴 분위기다. 그간 이 시장은 여러 수입차업체들이 꽉 움켜쥔 ‘그들만의 리그’였지만 최근 현대·기아자동차를 필두로 국산 고성능 라인업이 속속 추가되며 균열이 생겼다. 지키려는 측과 빼앗으려는 측의 치열한 경쟁이 흥미를 더한다.
고성능차는 어마어마한 성능에 독창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는 슈퍼카와는 약간 다른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차종 중에서 주행성능을 크게 높인 모델을 고성능차라 부른다. 특히 요즘 고성능차의 개발방향은 ‘날마다 탈 수 있는 차’다. 평상시엔 출퇴근용으로 쓰지만 주말에는 근교 드라이빙 또는 서킷 주행을 즐기며 뛰어난 성능을 마음껏 체험할 수 있는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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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i30N 레이스카 /사진제공=현대자동차 |
◆국산 고성능차, 드디어 등장
현대차는 2012년 가을 파리모터쇼에서 세계 3대 모터스포츠 대회 중 하나인 WRC(월드랠리챔피언십) 복귀를 공식 선언한 이후 2014년부터 꾸준히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이와 함께 뉘르부르크링24시 내구레이스에도 참가하며 담금질에 집중했다.
이런 움직임을 지켜보는 업계와 소비자의 시각은 긍정적이다. 사실 현대차는 이전에도 고성능을 내세운 모델을 출시했지만 단순히 엔진 출력만 높였을 뿐 차의 토털 밸런스에는 신경쓰지 못해 외면받기 일쑤였다.
절치부심하던 현대차는 2014년 BMW 고성능디비전M의 핵심인물 알버트 비어만을 부사장으로 영입하며 고성능차 개발에 기대감을 갖게 했고 다음해인 2015년 서울모터쇼에서 그 윤곽이 드러났다. 이 자리에서 현대차는 고성능브랜드에 대한 입장을 공식화하며 브랜드 최초의 미드십스포츠카 개발과정도 소개했다.
지난해부터는 본격적으로 고성능차를 내놓기 시작했다. 고급브랜드로 독립한 제네시스브랜드의 주력모델인 G80의 스포츠버전을 출시했고 올해는 같은 플랫폼을 쓴 기아자동차의 스팅어가 출격 직전이다. 또한 한 체급 아래 제네시스 G70도 럭셔리 스포츠카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올해 본격적으로 고성능차 반열에 이름을 올린 건 스팅어다. 론치콘트롤을 활용하면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도달하는 데 단 4.9초밖에 걸리지 않아 수입 고성능차에 뒤지지 않는 성능을 지녔다. 3가지 엔진 중 가장 강력한 3.3리터 트윈터보 GDi 모델은 최고출력 370마력(PS), 최대토크 52.0㎏·m의 동력성능을 자랑한다. 여기에 후륜 8단자동변속기와 4륜구동방식까지 추가돼 성능을 끌어올린다.
사람들의 기대가 큰 건 i30N. 정의선 부회장이 야심차게 준비한 고성능부문 N브랜드의 첫 차다. N브랜드는 현대 외에 제네시스브랜드에도 적용되는 각 차종의 고성능 버전을 의미한다.
N브랜드 전략은 폭스바겐 R, 아우디 S와 닮았고 큰 그림은 메르세데스-AMG, BMW M과 맥을 같이 한다. 폭스바겐 R라인, 아우디 S라인처럼 양산형 차에 에어로파츠와 인테리어 등 일부 요소를 적용해 고성능차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고 실제 동력성능을 높인 차를 통해 마니아들의 요구도 맞춰줄 수 있다. 또한 필요에 따라 이보다 한 단계 위급인 서킷레이싱 스펙의 차종을 만들기도 쉬워진다.
고성능 수입차브랜드의 라이벌 메르세데스-AMG와 BMW M은 소형부터 대형까지 아우르는 모든 차급에 고성능라인업을 보유, 소비자의 다양한 요구에 대응한다. 국내도 예외가 아니어서 전시장부터 서비스센터까지 특별함으로 무장했다. 특히 최근엔 상징적인 모델을 연이어 국내시장에 투입, 후발주자와의 격차 벌이기에 집중한다.
그만큼 성능도 압도적이다. 지난 2017서울모터쇼에서 공개한 메르세데스-AMG GT R은 최고출력 585마력의 AMG 4.0리터 V형8기통 바이터보 프런트-미드 엔진을 탑재했고 정교하게 개발된 서스펜션으로 최고의 역동성을 추구한다.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에 단 3.6초만에 도달한다.
BMW는 플래그십 모델인 7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뉴 M760Li xDrive를 앞세운다. 6.6리터 V형12기통 엔진을 탑재해 5500rpm에서 최고출력 609마력, 1550rpm에서 최대 81.6㎏·m토크를 낸다.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단 3.7초면 도달한다. 7시리즈 중 퍼포먼스를 강조한 탓에 M을 붙였지만 고성능 전용모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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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뉴 메르세데스 AMG GT R. /사진제공= 메르세데스벤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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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M760Li xDrive. /사진제공=BMW 코리아 |
◆선순환의 열쇠 '고성능차'
현대·기아차가 모터스포츠 투자에 인색하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동안 회사 입장에선 고민이 적지 않았다. 모터스포츠에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쏟아도 여기서 쌓은 노하우를 활용할 곳이 없어서다.
수입차업계에 따르면 메르세데스-벤츠·BMW·아우디·폭스바겐·토요타·닛산·GM·포드 등 글로벌제조사들은 저마다 고성능차와 개별 브랜드를 운영한다.
해외 모터스포츠업계 관계자와 고성능 부서의 관계자들은 “자동차회사가 모터스포츠에 많은 돈을 들여 개발한 기술은 고성능차에 충분히 활용할 수 있고 나아가 대중차에도 필요한 만큼 적용해 재활용이 가능하다”면서 “그만큼 개발비를 아낄 수 있고 많은 차를 팔아 벌어들인 수익으로 또다시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선순환구조가 생긴다”고 입을 모은다. 국산 고성능차의 잇따른 출시 소식이 국내외 업계와 마니아들에게 호응받는 배경이다.
이에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그동안 이 같은 구조를 만들지 못해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라며 “국내외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이전과 차별화된 성능을 내는 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우려한다. 이전 양산차를 팔 때와 달리 타깃이 협소하고 수요가 한정돼서다.
이에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국산차는 수입 고성능차를 흉내내기에 급급한 탓에 성능과 감성품질에서 차이가 컸다”면서 “앞으로 특수시장에 진출하는 만큼 불특정 다수를 상대한다기보다 소수의 마니아를 만족시켜야 할 것”이라고 평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8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