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박흥순 기자
/사진=박흥순 기자

대한민국이 갈수록 거칠어진다. 묻지마 폭행과 살인이 횡행하고 도로 곳곳에서 벌어지는 보복운전, 동물학대 등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분노조절장애라는 정신질환이 도사리고 있다. 최근 4년간 분노조절장애 판정을 받은 환자는 20% 가까이 증가했다. <머니S>가 화를 참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살펴봤다.
[분노조절장애에 멍드는 폭력사회] ③ 다시 등장한 '분노방'

외환위기 여파로 사회전반에 스트레스가 퍼져있던 1990년대 말 서울시내 곳곳에 ‘분노방’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5평 남짓한 공간에서 그릇을 깨고 각종 기물을 부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2000년대 중반 자취를 감췄던 분노방이 최근 다시 등장했다. 고용불안정, 양극화 심화, 상대적 박탈감, 개인주의로 인한 인간관계 파괴까지 일상에서 불안과 분노를 느낀 이들이 고객이다. 순간적인 일탈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는 분노방은 어떤 곳일까. 직접 체험해봤다.


◆최대 15만원… 다소 비싼 가격

최근 서울 마포구의 한 분노방을 찾았다. 주말 저녁 거리로 쏟아져나온 사람들을 뒤로하고 비교적 한산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분노방이 위치한 3층으로 올라갔다. 순서를 기다리면서 둘러본 매장 한켠에서 각종 안전장구와 파손된 기물을 보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분노방은 2만~15만원의 요금을 내고 약 20분간 방안의 기물을 부수는 ‘체험공간’이다. 맘껏 부술 수 있는 물품은 세라믹 재질의 그릇, 모니터, 복합기, 밥솥 등 다양했다. 물건을 부술 때도 장도리, 야구방망이 등 다양한 도구를 고를 수 있다.

분노방 체험은 간단한 설명을 듣고 사고 책임을 본인이 지겠다는 내용의 동의서에 서명해야 진행할 수 있다. 동의서에 ‘어떤 경우에도 업체를 상대로 소송하지 않는다’는 항목이 눈에 거슬렸지만 체험을 위해 서명하고 방을 안내받았다. 기자는 그릇 30개와 가전제품 1개를 부술 수 있는 코스를 골랐다. 가격은 5만원. 직원은 가장 많은 이가 찾는 코스라고 설명했다.


◆부수고 던지며 짜릿한 희열

입장 전 문앞에 비치된 안전장구를 착용했다. 안면보호마스크가 부착된 헬멧과 목장갑, 부직포로 된 상하의를 입고 방 안에 들어섰다. 방 하나의 크기는 생각보다 넓었다. 한쪽 벽면에는 타이어가 부착돼 마음껏 두들겨팰 수 있으며 정면에는 두꺼운 철판이 세워졌다. 분노를 풀 만반의 준비가 끝나자 문이 닫히고 노래가 흘러 나왔다. 오후 늦게 예약을 한 터라 시간에 관계 없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다.

먼저 가볍게 몸풀기로 그릇을 던졌다. 별다른 무늬가 없는 그릇은 생각보다 쉽게 깨지지 않았다. 처음 던졌던 그릇은 계속 부서지지 않고 그대로 튕겨나왔다. 같은 그릇을 세번째 던지자 ‘쨍그랑’ 시원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이렇게 29번을 더해야 한다니…. 분노·스트레스를 풀러 왔다가 오히려 더 쌓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점차 요령이 쌓였고 10개 남짓 던졌을 즈음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릇이 깨지는 소리는 중독성이 있다. 강한 자극은 기자를 더 흥분시켰다. 내친 김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복합기 앞에 섰다.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의 마음가짐으로 몸을 풀었다. 허공에 연습 삼아 방망이질을 몇번 하고 장작 패듯 수직으로 복합기를 내리쳤다. 예상보다 큰 충격에 손목이 아팠다. 하지만 복합기는 멀쩡했다. 오기가 생겼다. 이번엔 수평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복합기의 뚜껑이 뜯어졌고 파편이 이리저리 튀었다. 분노방 체험 중 가장 희열을 느낀 순간이었다.

이후엔 거칠 것이 없었다. 기자는 복합기를 부수는 데 혈안이 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파괴체험’에 집중했다. 분노방에 동행한 지인은 “사물을 부술수록 표정이 밝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딱딱하게 굳어지더라”고 말했다.
/사진=박흥순 기자
/사진=박흥순 기자

◆스트레스 풀리지만 밀려오는 공허

주어진 시간을 10분가량 넘어선 30분 동안 온전히 분노해소 체험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소 무리를 했는지 어깨는 천근만근이었다. 스트레스는 분명 풀렸다. 직장·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쌓였던 분노를 마음 놓고 분출할 수 있었다.
다만 안전장구를 착용했음에도 그릇 등의 파편이 얼굴로 날아든 건 옥에 티였다. 조금만 부주의해도 사고로 직결될 수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더욱이 시간이 흐를수록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았고 감정이 격해졌다. 그릇과 사물이 부서질 때마다 더 거세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더 이상 방안에 부술 물건이 없어지자 아쉬움과 허탈이 밀려왔다. 하지만 속은 후련했다.

기자가 분노 해소 체험을 마치고 방을 나설 때 건장한 남성 두명이 매장으로 들어섰다. 이들은 각각 5만원짜리 코스를 신청했다.

경기 부천에서 외식업을 한다는 김모씨(33)는 “최근 경기가 많이 어려워 사업이 잘 되지 않는다”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낚시·등산 등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보다 강한 자극이 필요할 때면 분노방을 찾는다”고 말했다.

김씨와 동행한 직장인 최모씨(32)는 “얼마 전까지 일을 쉬다가 최근 다시 직장을 구했지만 인간관계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처음 분노방을 찾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60호(2018년 10월3~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