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은옥 기자
그래픽=김은옥 기자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에서 유래된 이 구절은 황혼에 접어들며 빛과 어둠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때를 의미한다. 언덕 너머에서 다가오는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이다. 글로벌 전기차 전환에 힘입어 고속 성장해온 국내 배터리업계에 수요 부진이라는 불황이 찾아온 현재와 겹쳐진다.

최근 배터리업계에 어둠이 짙어지고 있다. 맏형 LG에너지솔루션의 매출이 꺾였고 아직 실적이 공개되지 않은 삼성SDI와 SK온 전망도 밝지 않다. 경쟁사 중국 업체들은 내수 시장을 넘어 글로벌 무대에서 약진하고 있다. 국내 업체들의 신규 미국 공장이 내년부터 가동 예정인 점을 감안, 올해 고비를 잘 넘겨야 성장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품질·원가경쟁력 등 기본이 중요한 시점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4분기 매출 8조14억원, 영업이익 3382억원을 기록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6.3% 줄고 영업이익은 42.5% 늘었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2년 1월 유가증권시장(코스피) 상장 이후 처음으로 매출이 2분기 연속 감소했다. 영업이익은 1년 전보다 개선됐으나 이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첨단세액공제(AMPC) 덕분이다. AMPC를 제외한 영업이익(2023년 4분기)은 881억원에 그친다.

삼성SDI와 SK온도 역성장이 우려된다. 삼성SDI는 지난해 4분기 매출 6조258억원, 영업이익 4798억원을 기록했을 것으로 증권가는 본다. 2022년 4분기 대비 매출 1.0% 증가, 영업이익 2.2% 감소다. SK온은 같은 기간 적자를 지속한 것으로 관측된다. 전기차 수요 둔화로 인한 판매량 감소와 니켈 등 핵심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가 국내 업체들의 실적 부진 배경으로 꼽힌다.

국내 기업들이 주춤하고 있는 사이 중국 업체들의 영향력은 확대됐다. 중국 CATL은 지난해 1~11월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에서 점유율 27.7%를 기록했다. 전년도 같은 기간(22.1%)보다 5.6%포인트 성장하며 1위 LG에너지솔루션을 따라잡았다. LG에너지솔루션 점유율은 같은 기간 29.1%에서 27.7%로 1.4% 포인트 하락했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는 "중국 업체들은 내수 시장보다 비(非)중국 시장에서 성장률이 더 높다"며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업체들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핵심 시장인 미국에 건설하고 있는 신규 공장이 내년부터 순차 가동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애리조나에 총 43기가와트시(GWh) 규모 단독공장을 짓고 있다. 현대자동차·제너럴모터스(GM)·혼다·스텔란티스 등과도 합작 형태로 총 215GWh의 공장을 건설 중이다. 삼성SDI는 GM·스텔란티스와 합작공장 총 세 곳(97GWh)을, SK온은 포드·현대차와 합작공장 총 네 곳(164GWh)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는 기본에 집중해 실적 악화를 최소화해야 할 때다. 제품·품질 우위를 유지하는 가운데 원가경쟁력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고객들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 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사장, 최윤호 삼성SDI 사장, 이석희 SK온 사장 등 최고경영자(CEO)들이 연말·연초 각각 언급한 ▲경쟁사를 압도하는 기술 리더십 ▲글로벌 최고 수준의 원가경쟁력 ▲고객과 굳건한 신뢰 관계 구축 등이 실현되길 바란다.
[기자수첩] 개와 늑대의 시간… K-배터리, 2024년 잘 넘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