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2월1일 경부고속도로가 착공에 들어갔다. 사진은 같은해 경부고속도로 예정지를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1968년 2월1일 경부고속도로가 착공에 들어갔다. 사진은 같은해 경부고속도로 예정지를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1968년 2월1일.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마침내 첫 삽을 떴다.

당시만 해도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무모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1968년 우리나라 경제지표는 인구 3013만명, 실업률 6.2%, 물가상승률 12%, 1인당 국민총생산(GNP) 142달러, 수출액 3억2000만달러 등으로 매우 열약했기 때문에 400㎞ 이상의 고속도로를 개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야당 등 정치권은 물론 경제계 등에서도 부정적인 의견이 빗발쳤다. 야당인 신민당은 성명을 통해 "정부가 예산조차 없는 경부간 고속도로를 착공하는 것은 예산법정주의에 어긋나는 처사"라며 "고속도로 개통으로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만든다고 말하지만 일일생활권은 이미 도로로 이뤄지고 있는 만큼 새로운 의미가 아니다"고 비난했다.

이 같은 우려에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몇 년 후 경제·산업이 어느 정도 성장하리라는 전망을 가지고 보다 더 큰 규모의 국토건설계획이 필요하다"며 경부고속도로 건설 준비를 촉구했다. 1967년 12월13일 국무회의에서 국가기간고속도로건설추진위원회 규정을 대통령령으로 의결·공포하고 총공사비 330억원 규모의 4차선 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수립했다.

차관 발급 거부로 자금 확보 난관… 해결책은?

박정희 대통령은 자금 확보를 위해 휘발유세를 인상하는 방안을 내놨다. 사진은 1970년대 당시 경부고속도로의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박정희 대통령은 자금 확보를 위해 휘발유세를 인상하는 방안을 내놨다. 사진은 1970년대 당시 경부고속도로의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가장 큰 문제는 자금 확보였다. 박 대통령은 몇 가지 재원 확보 방안을 마련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당시 100%였던 휘발유세를 200%로 올리는 석유류세법 개정안이다. 당초 박 대통령은 대부분의 공사비를 국제개발처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차관 등으로 조달하고자 했지만 IBRD는 개발도상국이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 돈을 쓸 필요가 없다며 차관 발급을 거부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휘발유세 인상을 통해 총 139억원 규모의 자금 충당을 모색했다. 석유류세법 개정안은 2월 국회에서 신민당 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공화당 단독 의결로 가결됐다. 또 고속도로 건설업체의 시설과 장비에 대해 투자공제제도를 적용하고 중장비 도입에 관세를 면제하는 등 몇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사업을 가능한 빠르게 추진하고자 했다. 1968년 2월1일 서울과 오산을 잇는 제1공구를 시작으로 4월3일 오산과 대전 간 제2공구, 9월11일 대구와 부산 간의 제4공구, 1969년 1월13일 대전과 대구 간의 제3공구 순으로 공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68년 12월 제1공구, 1969년 12월 제2·4공구, 마지막으로 1970년 7월7일 제3공구가 준공 및 개통됐다.

2년5개월 동안 비용 429억원, 인부 약 900만명, 장비 165만대를 투입한 끝에 총 길이 428㎞의 고속도로를 개통할 수 있었다.

산업화 상징으로 자리… '속도' 강조한 탓에 잡음도

공사가 빠르게 진행돼 2년5개월 만에 고속도로가 개통됐지만 관련 잡음도 언제나 뒤따랐다. 사진은 오늘날 경부고속도로의 모습. /사진=뉴스1
공사가 빠르게 진행돼 2년5개월 만에 고속도로가 개통됐지만 관련 잡음도 언제나 뒤따랐다. 사진은 오늘날 경부고속도로의 모습. /사진=뉴스1

사업이 빠르게 진행된 만큼 잡음도 끊이지 않았다. 고속도로 건설계획이 발표된 이후 서울 부동산업자들이 몰려들어 확정 노선 주변에 투기가 성행하는가 하면 시공사 6곳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선정해 나머지 건설사 30개 업체가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결국 기존 6개 업체에 10개사를 추가해 총 16개사가 시공에 참여했다.

급진적인 공사 진행으로 건설 도중 77명의 인부가 목숨을 잃었고 시공사 몇 곳은 무리한 차입으로 도산의 길을 걸었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땅이 고속도로에 파묻힌 몇몇 지주는 매매가 3분의1에 해당하는 턱없이 적은 보상금을 받기도 했다. 또 완공 후 몇 년 간은 '관광도로'라고 불리며 제 역할을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 됐든 경부고속도로는 오늘날 국토의 대동맥이라 불리며 1960~1970년대 경제 성장의 상징물로 자리매김했다. 개통 후 50년이 넘은 지금 대한민국은 천지개벽이 일어났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그런 의미에서 경부고속도로는 어쩌면 행운의 부적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