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18일 대구에서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방화 사건인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일어났다. 사진은 2‧18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21주기를 닷새 앞둔 지난 13일 오후 대구 중구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 마련된 추모 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모습. /사진=뉴스1
2003년 2월18일 대구에서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방화 사건인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일어났다. 사진은 2‧18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21주기를 닷새 앞둔 지난 13일 오후 대구 중구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 마련된 추모 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모습. /사진=뉴스1

2003년 2월18일.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아빠 뜨거워 죽겠어요.. 살려주세요." - 딸 정미희씨가 아버지에게
"열차에 불이 났다. 살아나갈 수 없을 것 같으니 꿋꿋하게 살아라." - 어머니 최금자씨(1941년생)가 아들에게
"여보! 나 하늘나라로 먼저 올라가네. 건강하게 잘 지내." - 남편 이해우씨(1947년생)가 아내 김민정씨에게


192명 사망…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방화 사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192명이 사망하고 151명이 부상당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방화 사건이다. 이 참사는 아침 출근길에 일어났다.

이날 오전 9시51분. 1079호 열차가 전 역인 반월당역을 출발하자 김대한(56세·남성)은 휘발유가 담긴 통을 만지작거리며 라이터를 껐다 켰다 하기 시작했다. 그때 반대편에 앉아있던 승객 전융남씨가 "보소! 당신 왜 자꾸 불을 켜는 거요!"라고 큰 소리로 항의하자 김대한은 행동을 멈추려는 듯했다.

오전 9시52분. 안심행 1079호 열차가 중앙로역에 도착했다. 김대한이 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는 순간 가방에 든 휘발유에 불을 붙이려 하자 승객 몇 명이 그를 제지하려고 나섰다. 하지만 김대한은 기어이 휘발유에 불을 붙였다. 자기 옷에 불이 붙자 놀란 김대한은 휘발유 통을 열차의 바닥에 던져버렸고 열차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열차 의자와 바닥 천장에 옮겨붙어 큰 불로 번졌다. 당시 열차는 의자부터 바닥까지 전부 불에 타는 가연재 소질이었기 때문에 불이 번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불에서 나온 검은 연기와 유독성 가스가 승강장과 지하 1~2층 대합실로 급속히 확산됐고 승객들이 주 출입구 쪽의 계단을 통해 대피하기 시작했다. 1079호 열차 기관사는 소화기로 초기 화재 진압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화재 발생 사실을 종합사령실에 보고하지 않은 채 대피했다.

종합사령실 기계설비 사령 주 컴퓨터에 중앙로역 화재 경보 문구가 뜨고 경보음이 울렸으나 종합사령실에서는 이를 무시했다. 평소에도 오류가 잦았기 때문이다.

2003년 2월 18일 대구에서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방화 사건인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일어났다. 사진은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20주기를 앞둔 지난해 13일 희생자 유가족들이 경북 칠곡군 지천면 대구시립공원묘지에 마련된 무연고 희생자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가족도 찾지 못한 채 잠든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모습. /사진=뉴스1
2003년 2월 18일 대구에서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방화 사건인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일어났다. 사진은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20주기를 앞둔 지난해 13일 희생자 유가족들이 경북 칠곡군 지천면 대구시립공원묘지에 마련된 무연고 희생자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가족도 찾지 못한 채 잠든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모습. /사진=뉴스1

오전 9시54분. 대구소방안전본부 종합사령실에 "1079호 열차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신고가 처음 접수됐다. 이후 역사 밖으로 탈출한 일부 승객들과 열차 안에 갇힌 승객들, 휴대전화로 통화한 가족들에 의해 신고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소방관이 도착한 후 불이 발생한 1079호 열차 승객들은 대부분 대피했는데 그 대열에는 방화범 김대한도 포함됐다. 1079호 승객들은 열차 내에서 전원 빠져나왔지만 대피하는 과정에서 49명이 유독가스에 질식돼 숨졌다.

비슷한 시각. 중앙로역 전 역에 멈췄던 1080호 열차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전 9시55분. 중앙로역 역무원이 종합사령실에 "중앙로역 실제 화재다. 전혀 앞이 분간이 안 된다. 신고 좀 부탁드린다"고 급히 보고했으나 종합사령실에서는 119에 신고하지 않았다. 지하철의 컨트롤 타워인 '종합사령실'에는 수십대의 폐쇄회로(CC)TV가 있었지만 사령실에 있던 직원 3명은 불이 난지도 몰랐다.

오전 9시55분이 돼서야 사령실은 화재를 인지했고 1080호 열차는 화재가 발생한 중앙로역에 들어오기 직전이었다. 1080호 열차를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종합사령실에서는 중앙로역으로 진입하는 1080호 열차 기관사에게 "전 열차에 알린다. 중앙로역 진입 시 조심히 운전해 들어가시기 바란다. 지금 화재 발생했다"고 지시했다. 진입금지나 무정차 통과 지시를 내리지 않은 것이다.

오전 9시56분. 큰 화재가 아니라고 판단한 대곡행 1080호 열차는 이미 검은 연기가 가득차 있던 중앙로역 승강장에 도착했다.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승강장에 있던 연기가 전동차 안으로 밀려들자 기관사는 즉시 출입문을 닫았다. 잠시 뒤 방화 셔터가 작동해 지하상가와 대합실 사이 대피로가 완전히 차단됐다. 셔터가 내려가기 직전까지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끝내 지하 1층 대합실에 갇혀 버렸다.

이때 1080호 열차 기관사가 종합사령실에 승객 대피 여부를 물었지만 운전사령은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사이 먼저 불이 났던 1079호 열차에서 1080호 열차로 불이 옮겨붙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전 10시2분. 1080호 열차에 전력이 공급되지 않고 중앙로역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종합사령실에서 1080호 열차 기관사에게 승객들을 승강장 위로 대피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전기가 끊겨 출입문은 열리지 않았고 수동으로 출입문을 여는 방법을 몰랐던 승객들은 열차 안에 갇혀 처참히 사망했다.

화재가 일어난 지 약 3시간 후인 오후 1시38분쯤 화재가 진압됐다. 이 참사로 사망 192명(신원 확인된 사망자 185명, 인정 사망 1명, 신원 미상 사망자 6명), 부상 151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났다.

사고 뒤 공개된 차량 내부는 시꺼먼 재와 고철만 남아 사고 당시의 참상을 짐작케 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직접적인 화상보다는 유독가스에 의한 기도 화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불에 타 버리는 바람에 유해들은 형체도 못 알아볼 만큼 처참한 상태였다. 심지어 뼛가루조차 찾지 못해 불연성 지팡이 하나만으로 사망이 인정된 사례도 있다. 유해 수습은 3개월이나 걸렸다.

무능한 상황실과 가연 재질의 열차가 키운 참사

2003년 2월 18일 대구에서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방화 사건인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일어났다. 사진은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20주기를 앞둔 지난해 13일 오후 대구 중구 대구시청 동인청사 앞에서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 노동계, 정당, 일반 시민 등 추모위원회 관계자들이 참사 20주기 추모기간 선포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사진= 뉴스1
2003년 2월 18일 대구에서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방화 사건인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일어났다. 사진은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20주기를 앞둔 지난해 13일 오후 대구 중구 대구시청 동인청사 앞에서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 노동계, 정당, 일반 시민 등 추모위원회 관계자들이 참사 20주기 추모기간 선포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사진= 뉴스1

방화범은 김대한으로 2ℓ의 휘발유로 지하철에 불을 질렀다. 그는 정신질환도 없었으며 방화 전과자도 아니었다. 그는 뇌졸중에 따른 반신불수와 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이게 다 세상 탓이다. 내가 이렇게 된 게 너무 억울하니까 다 같이 죽자"라는 마음이었다고 불 지른 이유를 밝혔다. 김대한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방화범의 휘발유 2ℓ로 발생한 화재지만 192명이 사망할 정도의 대형참사로 확대된 건 대구 지하철 종합사령실의 무능과 가연 재질로 만든 열차 내부 때문이었다.

이 사건 이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모든 지하철이 불연재, 극난 연재로 교체됐다. 화재 대비 매뉴얼도 마련됐고 비상정지를 시킬 수 있는 버튼도 구비됐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지하철 승객들은 휴대전화와 문자메시지, 음성사서함을 통해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문을 열 줄 몰랐던 승객들은 꼼짝없이 객차 안에서 참변을 당했고 이들은 연기가 자욱해지는 열차 안에서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전달했다. 이들 대부분은 1080호 열차의 승객들이었다.

희생자들의 마지막 통화는 차후 실종자 수색에 큰 도움이 됐는데 이들의 통화 기록을 통해 최종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앙로역은 수신기가 단독으로 설치돼 있어 여기서 마지막으로 기록이 잡혔다면 사고 현장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실종자를 찾는 포스터에는 이들의 마지막 휴대전화 위치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통신사 3사 역시 실종자 가족에게 실종자와의 마지막 통화 위치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