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2월21일 대구에서 나랏빚 1300만원을 갚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됐다. 사진은 지난 2019년 2월21일 대구 중구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앞에서 열린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와 내빈들이 기념비를 공개하는 모습. /사진=뉴스1
1907년 2월21일 대구에서 나랏빚 1300만원을 갚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됐다. 사진은 지난 2019년 2월21일 대구 중구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앞에서 열린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와 내빈들이 기념비를 공개하는 모습. /사진=뉴스1

1907년 2월21일. 대구에서부터 나랏빚을 갚고자 하는 범국민적 모금 운동이 시작됐다. 일제에 맞선 경제 국권 수호 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이 그것이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 이후 사실상 일본에 넘어갔다.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 9월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화폐 발행권을 박탈하고 전환국을 폐쇄했다. 사실상 조선의 경제권을 일본의 경제권에 예속시켰다. 1905년 11월 맺어진 제2차 한일 협약, 일명 을사늑약을 맺으면서 일본 제국은 자칭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하여'라는 구실을 앞세워 근대시설 개선, 철도 부설 등 갖가지 명목하에 강제로 차관을 도입시켰다.


결국 대한제국은 1300만원의 빚더미에 앉았다. 당시 공무원인 주사의 봉급이 15원, 신문 한 달 구독료가 30전임을 고려하면 매우 큰 금액이며 대한제국의 1년 예산에 맞먹는 수준이었다.

나랏빚 1300만원,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

서상돈씨는 국채 1300만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며 800원을 의연금으로 내놓았다. 사진은 지난 2023년 8월16일 대구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들이 대구 중구 서상돈 고택에서 서상돈 선생의 특별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추대식을 가진 모습. /사진=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서상돈씨는 국채 1300만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며 800원을 의연금으로 내놓았다. 사진은 지난 2023년 8월16일 대구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들이 대구 중구 서상돈 고택에서 서상돈 선생의 특별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추대식을 가진 모습. /사진=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대구의 출판사인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씨는 나랏빚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는 1907년 1월29일 대동광문회 특별회에서 국채 1300만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를 발의하고 즉석에서 800원을 의연금으로 내놓았다. 200여명의 다른 회원들도 만장일치로 서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대한매일신보에서 국채보상운동을 대대적으로 광고했고 이 운동은 전국에 들불 같이 번졌다. 1907년 2월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국채보상운동 취지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다.


"지금 국채 1300만원이 있으니 이것은 우리 대한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를 갚으면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 추세입니다. 지금 국고로는 갚기가 어려운 형편인즉 장차 삼천리 강토는 우리나라의 소유도, 우리 국민의 소유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2000만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원이 될 것이니 만약 모자란다면 1원, 10원, 100원, 1000원씩 낼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출연시키면 됩니다. 우리가 감히 이를 발기하고 그 취지문을 붙이면서 피눈물로 엎드려 호소합니다."

담배 끊으면 나라가 산다… 은반지 팔아 빚 갚자

남자들은 금주와 단연을, 여자들은 자신들의 장신구를 팔아 돈을 모았다. 사진은 1907년 3월8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여성들이 국채보상운동에서 활동한 내용이 나와있는 1907년 3월8일자 대한매일신보. /사진=대구여성가족재단
남자들은 금주와 단연을, 여자들은 자신들의 장신구를 팔아 돈을 모았다. 사진은 1907년 3월8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여성들이 국채보상운동에서 활동한 내용이 나와있는 1907년 3월8일자 대한매일신보. /사진=대구여성가족재단

이에 남자들은 금주와 단연을, 여자들은 자신들의 장신구를 팔아 자발적으로 돈 모으기를 시작했다. 국채보상운동은 곧 전국으로 퍼져나가 노동자, 인력거꾼, 기생 등 당시 하층민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한자강회월보' 4월호에는 담배를 끊어 국채를 탕감하자는 결의를 담은 노래 '단연 동맹가'가 실렸다. 무엇보다 여성의 참여가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2월23일 대구 남일도에서 여성들은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는 남녀의 차이가 없는 것인데 여자는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방법을 논하지 않아서 우리는 폐물로서 참여하겠다"고 선언하며 '폐물폐지부인회'를 설립했다. 이후 서울, 인천, 대구, 부산, 진주, 김포, 제주도에 '국채보상부인회'가 조직됐다.

대구에서 시작된 운동은 전국 운동으로 확산했고 국외에 있는 유학생이나 교포들까지 의연금을 보내왔다. 안중근 의사도 '국채보상관서동맹회'를 설립해 의연금 모집 독려에 앞장섰고 고종 황제 또한 금연하면서 국채보상운동에 힘을 보탰다. 1년 동안 약 4만명이 참여했고 무려 200만원 상당의 성금 마련에 성공했다. 이는 국채의 5분의1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100여년 이어온 위기 극복 DNA

2017년 10월30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사진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중 국채보상단연회의 의연금 모금장부. /사진=대구시
2017년 10월30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사진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중 국채보상단연회의 의연금 모금장부. /사진=대구시

국채보상운동이 단순한 경제적 구국운동에서 벗어나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띠자 당황한 일본은 계략을 펼쳤다. 일본은 대한매일신보 사장인 영국인 베델과 운영자 양기탁씨가 돈을 횡령했다고 누명을 씌웠다. 이를 계기로 베델은 영국으로 추방당하고 양씨는 재판에 회부됐지만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주체 동력을 잃은 운동은 점점 힘을 잃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 기금은 훗날 민립대학 설립 등 독립운동을 위해 사용됐다.

2017년 10월30일 전 국민이 함께한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의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됐지만 유례없는 경제적 민족운동이자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 국채보상운동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으로 재현됐다. 2019년 일본 반도체 소재 등에 대한 수출 규제에 맞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벌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듯 100여년을 이어온 민족 특유의 결속력과 단합된 의지는 위기 속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한국인에게는 위기가 오면 온 국민이 힘을 모아 돌파하는 DNA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