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3년 3월18일 최영오 일병이 상관살해죄로 처형됐다. 사진은 지난 2014년 6월22일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마을 주변에서 육군 22사단 GOP(휴전선을 지키는 일반전초) 총기난사 탈영병 추격작전에 투입된 군 병력. /사진=뉴스1
지난 1963년 3월18일 최영오 일병이 상관살해죄로 처형됐다. 사진은 지난 2014년 6월22일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마을 주변에서 육군 22사단 GOP(휴전선을 지키는 일반전초) 총기난사 탈영병 추격작전에 투입된 군 병력. /사진=뉴스1

1963년 3월18일. 최영오 일병이 상관살해죄로 처형됐다. 최영오 일병 사건은 대한민국 군 인권 문제에 경각심을 일으켰다.

군 위문공연이 예정됐던 1962년 7월8일. 육군 제15보병사단 연병장에는 장병들이 모여들었다. 이곳에서 최영오 일병(당시 25세)은 같은 내무반 정모 병장과 고모 상병을 M1 소총으로 살해했다. 최 일병이 상사 2명 등을 향해 총기를 난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최 일병의 연애편지를 상습적으로 뜯어보던 두 선임병의 희롱이 발단이 됐다.


서울대 천문기상학과 4학년이던 최 일병은 학적보유병(학보병)으로 군에 입대한 상황이었다. 학보병은 이승만 재임 시기에 대학생을 우대하기 위해 일반 병사 기준 3년인 의무 복무기간을 18개월로 단축시킨 제도로, 일반 병사와 학보병 간 군복무기간 차이에 따른 차별의 폐단을 낳았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학보병 신분으로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한 최 일병 역시 일반 병사들의 부러움과 미움을 받았다. 상습적인 희롱과 괴롭힘에 항의하던 최 일병은 "사신 검열을 막아 달라"고 청원하고 중대장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오히려 선임병들의 눈엣가시가 됐고 일방적인 구타와 가혹행위가 가중됐다. 이에 격분한 최 일병이 선임병들을 총으로 살해한 것이다.



서울대 동문 등 각계의 탄원에도... 사형 집행


당시 최 일병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범행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가 제지를 당한 최 일병은 '상관 살해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최 일병은 대법원에 항고했으나 이마저 기각돼 1963년 3월18일 사형선고가 확정됐다. 5·16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 군사 정권이 들어선지 불과 1년여 뒤였다.

백철, 최정희 등 문인들과 서울대 재학생들이 구명운동을 벌였지만 사형은 그대로 진행됐다. 당시 상관살해죄는 법정형이 사형밖에 없던 탓에 탄원서를 돌려도 사형판결은 피할 수 없었다. 그 결과 1963년 3월18일 오후 2시40분 최 일병에 대한 총살이 진행됐으며 그의 시신은 가족 동의없이 군에 의해 강제 화장 처리됐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최 일병은 처형 직전 "제가 죽음으로써 우리나라 군대가 민주적인 군대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총살 후 그는 일병에서 훈련병으로 강등됐으며 사체인수통지서를 받은 그의 어머니는 충격으로 그날 밤 한강에 투신해 아들의 뒤를 따랐다.



최일병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는 총기 사건


사진은 지난 2015년 2월3일 육군22사단 GOP(휴전선을 지키는 일반전초)에서 총기난사 후 탈영한 임모 병장이 1군사령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나오는 모습. /사진=뉴스1
사진은 지난 2015년 2월3일 육군22사단 GOP(휴전선을 지키는 일반전초)에서 총기난사 후 탈영한 임모 병장이 1군사령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나오는 모습. /사진=뉴스1

최 일병 사건 이후 학보병 제도는 폐지됐으나 그의 일가족은 연좌제로 용공분자로 낙인찍혀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까지 피해를 입었다. 반면 살해당한 정 병장과 고 상병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이 사건은 1965년 유현목 감독의 영화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신성일, 엄앵란 등 유명배우가 출연해 화제가 됐으나 주인공을 비롯한 사건 전체 내용이 왜곡돼 미화물이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군인 장병의 인권 문제는 군사 정권 시절에만 그치지 않았다. 지난 2014년 6월 강원 고성군 22사단에서도 집단따돌림에 격분한 임도빈 병장(23)이 총기 난사 후 탈영했다. 이 사건으로 장병 5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임 병장은 이듬해인 2015년 8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대법원은 "비무장 상태인 동료 소초원을 대상으로 계획적이고 잔혹한 범행을 저질렀다"며 임병장에게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임병장 측 변호인은 "부대 내 만연한 집단 따돌림이 범행의 주요 원인이므로 정상 참작을 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