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정치 고향'이자 안철수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의 지역구인 경기 성남 분당구가 경기도의 진보·보수 격전지로 떠올랐다. /사진=김서연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정치 고향'이자 안철수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의 지역구인 경기 성남 분당구. 1970년대 서울 강남 개발과 함께 빈민 강제이주 정책으로 만들어진 성남시는 풀뿌리 민주화운동과 주민자치운동의 시작점이었다. 이후 분당신도시 개발을 통해 첨단산업단지와 전문직 종사자들이 유입되면서 1세대 '신도시 성공모델'로 자리잡았다. 분당구가 경기도의 진보·보수 격전지로 떠오르게 된 배경이다.

분당의 민심은 단순한 보수·진보 구도로 나뉘지 않는다. 세대별, 지역별, 직업군에 따라 민심이 세밀하게 쪼개진다.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원하는 중장년층, 실용과 경제 성장을 중시하는 청년 직장인, 그리고 지역 기반 후보에게 끌리는 정서까지 얽혀 있다. 이처럼 다양한 계층과 세대가 섞인 성남은 정치인들에게 '대한민국 축소판'을 경험할 수 있는 무대가 됐다.

경기도의 대표적인 '보수 텃밭' 분당구 을지역… 견고한 정자·젊어진 수내

분당구 을 지역은 경기도 내에서도 소득 수준이 매우 높은 지역이며 전통적인 '보수의 텃밭'으로 불린다. /사진=김서연 기자

25일 오전 10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카페거리. 고층 주상복합 대단지 사이로 푸른 가로수가 우거진 거리에는 여유롭게 커피를 즐기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카페 테라스에는 노트북을 펼치고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고, 길가에 세워진 노란 공유자전거가 이따금 조용한 거리를 가로질렀다.


분당구 을 지역은 경기도 내에서도 고소득층이 밀집한 전통적인 보수의 텃밭이다. 정자동 일대는 특히 5060세대 은퇴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60대 은퇴 교사 A씨는 "신혼부부들은 처음에는 판교에 살다가 자녀 교육을 위해 정자나 수내로 옮겨온다"며 "그래서 이쪽은 연령대가 높고 자연스럽게 보수 성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포함해 우리 아파트 사람들은 대부분 보수진영의 대선후보를 뽑겠다는 입장"이라며 "정치성향이 워낙 강한 지역이다보니 진보성향을 드러내는 사람을 보지는 못했던 같다"이라고 말했다. "다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요즘은 눈치가 보여서 속내를 잘 드러내진 않는다"고 털어놨다.
분당신도시 초창기부터 조성된 지역인 정자동은 고층 아파트·오피스텔·상가가 복합적으로 구성된 주거단지가 많다. /사진=김서연 기자

50대 대학교수 B씨 역시 정자 민심의 '보수사랑'에는 동의했다. 다만 보수진영의 후보 개별에 대한 평가에는 회의감이 든다는 입장이다. B씨는 "투표하는 것 자체가 망설여지는 상황"이라며 "이 정도로 나라를 이끌어갈 인물이 없나 싶을 정도다. 유권자로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오히려 내 한 표가 잘못된 선택이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두렵다"고 말했다.

B씨는 2000년대를 회상하며 현재의 정치 상황에 대한 실망과 회의를 털어놨다. "정치판 자체가 깊이가 없고 경박스러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정책을 발표할때마다 '한국형'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나오는데 고민의 깊이가 얕고 정책설계가 가벼워 현실과 괴리될 수 밖에 없다"고 탄식했다.
분당구 을지역에는 자녀를 키우는 유권자들이 많아 대선 후보자들을 고를때 교육 정책을 유심히 살펴보는 경향이 높다. /사진=김서연 기자

수내동에 거주하는 40대 직장인 C씨는 연차를 내고 첫째 딸이 다니는 학원의 학부모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C씨의 최대 고민은 아파트값과 아이들 교육이다. 용인에 거주하던 C씨는 중학생인 첫째와 초등학교 고학년인 둘째를 위해 이 곳에 온지 대략 3년 정도 됐다고 했다. C씨는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교육과 주거환경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어떤 후보의 정책이 지역구에 도움이 될지가 중요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수내는 정자에 비해 확실히 진보적인 사람들도 많은 편인거 같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성남시장이던 시절이 좋았다고 이 후보를 뽑겠다는 사람이 많다"면서도 "재건축초과이익환수법 때문에 돌아선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첨단산업과 젊은 표심의 판교… 젊은 유권자들 정치 회의론 짙어

판교테크노밸리의 테크원 타워에는 IT, 바이오, 스타트업 등 빅테크 기업들이 다수 입주해있다. /사진=김서연 기자

성남대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분위기는 미묘하게 달라진다. 대형 아파트 단지와 현대백화점, 판교테크노밸리가 이어지는 분당 갑 지역. 점심시간을 앞둔 판교역 사거리에는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식당가로 향하고 있었다. 휘황한 빌딩 숲 사이로 자유롭게 개성을 뽐내는 IT개발자, 양복을 갖춰 입은 사무직 등 다양한 산업군이 섞여 만드는 활기가 매력이다.

판교테크노밸리에는 IT, 바이오, 스타트업 등 신산업을 이끄는 기업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정치인들은 분당을 기반으로 산업정책, 경제개발 아젠다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고, 이를 전국 단위 정치 무대에서 활용할 수 있었다. 신산업 정책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유권자들이 많은 만큼 정책에 '진심'인 유권자들이 많다.

활기찬 판교테크노밸리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정치를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현실주의적 공기가 짙었다. 정치 자체에 관심이 사라졌다며 인터뷰를 거부하는 유권자들도 많았다. 진보 보수 가릴 것 없이 기존 정치 인물들이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현 상황에 염증을 느낀다는 의견이 컸다.
판교 테크노밸리 1번출구 앞 광장에서는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가 'AI 기술 패권시대'를 주제로 한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 /사진=김서연 기자

기자가 방문한 당일 판교 테크노밸리 중심부에서는 'AI 기술 패권시대'를 주제로 한 공개 토론회가 열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유리 건물들 사이 인공지능, 스타트업, 경제를 주제로 두 후보자들의 토론이 이어졌고, 이를 유심히 지켜보는 시민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토론회를 듣고있던 백현동에 거주하는 게임개발자 30대 E씨는 "살림을 직접 해본 경험이 있는 이재명 후보가 그나마 나을 것 같다"고답했다. "지금 회사에 취업하기 전에 취업 보조금을 받았던 기억도 있고 성남에서 펼쳤던 정책들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매동에 거주 중인 30대 금융 IT개발자 D씨는 '정책의 현실성'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고 답했다. 금융 혁신의 현장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그는 기존의 아날로그 시스템을 전제로 만들어진 금융 규제와 씨름 중이다.

D씨는 "현장에 있다보면 현실을 전혀 모르는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답답하다"며 "돈을 얼마 쏟아붓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는지가 중요하지 않나"고 반문했다. "그나마 안철수 후보가 제일 낫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허무맹랑한 정책을 내놓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철수 후보는 29일 국민의힘 2차 경선 결과 발표에서 고배를 마셨다.
테크노밸리를 중심으로 한 동판교 유권자들은 실용주의·진보 성향이 두드러진 반면 거주지 중심인 서판교의 유권자들은 보수적인 성향이 두드러졌다. /사진=김서연 기자

판교 내에서도 동판교와 서판교 간의 온도차가 있었다. 테크노밸리를 중심으로 한 동판교 유권자들은 진보 성향이나 실용적 선택을 강조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거주지 중심인 서판교의 유권자들은 보수 성향이 비교적 짙었다.

판교 현대백화점에서 만난 30대 가정주부 F씨는 "남편이 무역회사를 하다보니 무역 통상 문제가 더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아무래도 트럼프 리스크를 제일 잘 헤쳐나갈 수 있는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미국과의 외교관계는 아무래도 보수진영 쪽이 더 잘할 것 같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