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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전 10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오가는 광주 서구 양동시장. 빈대떡과 국밥을 팔던 70대 상인 이재풍씨는 대선에서 누구를 찍을 것이냐는 질문에 "뭘 또 고민혀. 당연히 정해졌지"라고 말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치러지는 이번 대선에서 광주는 당연히 '민주당 후보'를 찍게 될 것이란 반응이었다.
광주는 민주당의 텃밭으로 불리는 호남의 '심장부'로 당 대표나 대선 후보 선출 등 주요 정치적 국면마다 전통적 지지층 민심의 '바로미터' 역할을 해온 상징성이 큰 지역이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광주 경선에서 시작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의 돌풍을 타고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서 정권을 재창출하기도 했다.
"우리는 5·18을 겪은 세대 아녀… 근데 또 계엄을 하겄다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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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40일 앞둔 이날, 광주의 민심은 대체로 '민주당을 밀어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뚜렷했다. 특히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불법 계엄을 자행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깊게 자리잡으면서 표심의 향방은 여느때보다도 분명해 보였다. 택시 기사 박모(58)씨는 "예전만치는 않어도 전라도 사람들은 민주당이제"라며 "이재명이 광주에 왔다던디 만나면 잘하라고 해야제"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5·18 민주화 운동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 있는 광주 시민들에게 12·3 계엄이 준 충격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자연스레 민주당을 향한 지지 정서를 다시금 결집시킨 듯 했다. 건식품 가게를 운영하는 임귀순(72)씨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혹시 또 뭐 일어날까 싶어서 지금도 밤마다 TV 켜놓고 잔다니께… 우리는 직접 눈으로 다 보고 겪은 사람들이여. 그날이 어땠는지 아는디 또 그 짓을 하겄다니 참말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니께."
정권 교체를 위해 경선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김동연, 김경수 후보가 지원사격에 나서주길 바라는 이도 있었다. 시장 모퉁이에서 배추를 손질하던 다른 상인은 "총 들이미는 거 다 봤는디 그게 계엄이 아니면 뭐시여. 무조권 (정권을) 바꿔야제. 김동연이나 김경수가 좋은 사람이니 나서서 도와줘야 혀"라며 "자리 싸움 하다가 또 정권 놓쳐불면 큰일이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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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는 이들도 적잖았다. 가판대에 홍어회와 홍어 무침을 내놓고 있던 양영옥(76세)씨는 "그 사람은 어릴 적에 고생을 했잖여. 그러니 서민 마음을 아는겨. 화끈화끈하고 똑부러지니께 일도 잘 하겄지"라며 과거 이 후보와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꺼내 보여줬다. 이 후보의 사법리스크 등을 언급하자 "검찰이 그토록 괴롭혀도 아무것도 안 나왔잖여. 깨끗한디 뭣혀"라고 되물었다.
20·30세대 "무조건 민주당? 그런 시대는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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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30세대에서는 민주당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열기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특히 '민주당은 당연한 선택'이라는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젊은 유권자들도 종종 있었다. 민주당의 핵심 지지 기반에서도 세대 간 온도차가 점차 뚜렷해지고 있는 셈이다.
점심 무렵 광주중앙도서관 인근에서 만난 강종원(30) 씨는 "광주에 민주당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는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그 영향을 크게 받지는 않는다"며 "민주당이라는 간판만 보고 투표하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동명로에서 만난 유수아(20) 씨는 "아빠는 이재명을 뽑으라고 하는데 저는 지지하는 후보가 딱히 없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친구들과 함께 식당서 나오던서 한 여성도 "주변에서 '광주는 민주당을 밀어줘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더 반감이 생긴다"며 "꼭 그렇게 해야 하나 싶다"고 했다.
20·30대 남성들은 민주당을 향해 뚜렷하게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광주의 대표적인 젊은 상권 중 하나인 동리단길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김지성(28)씨는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는 '민주당을 뽑을 바에는 투표를 하지 않겠다'는 말도 나온다. 민주당에 대한 반감이 그만큼 커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 정권 아래에서 청년 남성들이 소외감을 느껴왔다고 했다. "국민의힘을 찍는 순간 '내란 동조자'처럼 취급받는 분위기라 지금은 민주당을 지지하긴 하지만 민주당이 남성들을 대우해줬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고 토로했다.
관망층도 상당했다. 하태훈(18)씨는 "탄핵을 찬성한 사람 중 청년들에게 유리한 공약을 내세우는 쪽을 선택할 것"이라며 "예전엔 국민의힘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면 이제는 '이런 당도 있구나' 하게 된 것 같다"라고 했다.
반면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20·30세대는 이재명 후보에 대한 실용적 기대감을 표했다. 특히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후보'라는 인식이 민주당과 이 후보를 지지하는 주된 이유로 작용하고 있었다.
한 20대 남성은 "이재명 후보가 성남시장 시절부터 추진력도 있고 행정 경험도 많아 보였다"며 "경제도 살리고 여러모로 잘하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이 후보가 대표 공약이었던 '기본소득'을 뒤로 미루고 '선(先)성장 후(後)분배' 기조를 강조한 데 대해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광주에 이사 온 지 몇 년 됐다는 또 다른 20대 남성은 "기본소득은 결국 내가 나중에 갚아야 할 돈 아닌가 싶었는데 최근 경제 위기를 고려해 성장을 우선하겠다는 기사를 보고 맘에 들었다"고 말했다.
"당보고 뽑지 않을 것"… '상수' 아닌 '변수' 된 광주 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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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시민들은 민주당이 광주를 '당연한 지지기반'으로 여기다 보니 오히려 소외감을 느낀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 동안 대선은 물론 총선과 지방선거까지 민주당에 여지없이 압도적인 표를 몰아줬지만 그만큼 쌓인 불만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 결과에서도 이 같은 기류가 감지됐다. 당시 광주에서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84.82%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며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12.72%를 얻었다. 광주에선 1987년 민주화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국민의힘 계열 정당 후보가 두 자릿수 득표율을 넘긴 적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수치였다. 광산구에 거주하는 주부 박재순(52)씨는 "민주당도 이제 '광주는 무조건 우리 편'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광주)도 안 찍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된다"라고 말했다.
광주 일대를 돌다 보니"싸움박질(싸움질)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민주당도 협치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부쩍 들렸다. 당장 발등에 떨어지 경기 불황 등 민생 문제가 시급하다는 탄식이 곳곳에서 나왔다. 민주당 깃발만 보고 투표했던 과거와 달리 인물과 정책을 보고 선택하는 것이 진짜 '광주 정신'이란 자성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양동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야채를 소쿠리에 한 움큼 옮겨 담던 50대 상인은 "계엄 터지고 나서 손님 발길이 더 끊겼다. 10년 넘게 장사하면서 이렇게 어려운 적은 처음"이라며 "당 보고 찍는 게 아니라 정말 경제 걱정하고 서민들 살림살이를 챙길 줄 아는 사람을 뽑으려 한다"고 말했다. 한 어르신은 반찬에 앉은 파리를 휘휘 내쫓으며 "경제 살리는 사람이 최고"라며 "누구를 뽑아야 할지 모르겄어"라고 호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