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은 오늘도 그늘을 찾아 휴식을 취하는 노인들로 만원이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씩 기초연금을 주겠다던 약속은 어디가고 재정여건으로 인해 지급대상을 소득 하위 70%로 축소하고 지급액도 소득이나 국민연금 수령액에 따라 차등 지급하는 방향으로 대폭 축소된 것으로 알려졌다.(사진=뉴스1 안은나 기자)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은 오늘도 그늘을 찾아 휴식을 취하는 노인들로 만원이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씩 기초연금을 주겠다던 약속은 어디가고 재정여건으로 인해 지급대상을 소득 하위 70%로 축소하고 지급액도 소득이나 국민연금 수령액에 따라 차등 지급하는 방향으로 대폭 축소된 것으로 알려졌다.(사진=뉴스1 안은나 기자)

'유치원부터 노인정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 공약(公約)이 그야말로 공허한 약속이 됐다.

지난 9월26일 박근혜 대통령은 기초연금 문제와 관련해 만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씩 지급하지 못하는 결과에 대해 "죄송하다"고 사죄했다. "공약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지만, 후퇴 선언과 다를 바 없다. 이뿐 만이 아니다. 기초연금과 더불어 복지공약의 핵심으로 꼽히는 무상보육 또한 흔들리고 있으며, '4대 중증질환 무상의료' 공약도 반쪽짜리가 됐다.

박 대통령은 이러한 '공약 후퇴'의 이유로 어려운 재정 여건을 내세웠지만, 일각에서는 '미필적 고의'가 아닌 '기획사기'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공약 실현에 대한 의지부족과 예산집행의 비효율성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 기초연금은 '일단 후퇴', 무상보육은 '떠넘기고'

박 대통령이 기초연금과 관련해 사과를 했음에도 어르신들과의 약속을 저버린데 대한 비판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던 약속을 뒤집고 소득 70% 이하의 노인들에게 지급키로 했기 때문이다. 금액도 애초 약속한 20만원 전액이 아닌 10만~20만원까지 차등지급하는 형태다.

'기초연금 정부 최종안'에 따르면 내년 7월부터 소득 하위 70% 이하 노인 중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가입기간이 11년 이하이면 20만원 전액이 기초연금으로 지급된다. 그러나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12년이 넘으면 1년마다 기초연금액이 1만원씩 깎인다.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20년 이상이면 10만원만 받는다.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길수록 손해 보는 구조인 셈이다. 국민연금 성실가입자에 대한 역차별 논란이 불거지는 이유다.

현행 기초노령연금 제도는 현재 9만7000원가량인 연금액을 오는 2028년 20만원으로 올린다는 게 핵심이다. 다시 말해 박 대통령의 공약이 없었다면 미래 세대 가운데 하위 70%는 2028년이 되면 자연히 기초연금 20만원을 받게 된다. 반면 이번 정부안이 통과되면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대부분 12년을 넘게 되는 30~40대는 10만원 밖에 받지 못한다. 그냥 두면 20만원까지 받을 수 있는 연금이 새 정부안에 따라 반토막이 난 셈이다.

현재 노인세대를 위해 청장년층의 연금을 줄였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애초 제도취지와 달리 대폭 삭감된 국민연금을 제대로 보완하지 못하면서 미래세대의 노후를 더욱 불안하게 하고 세대갈등마저 조장하는 '개악안'"이라고 꼬집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또다른 복지 핵심공약인 무상보육도 흔들리고 있다. 박 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올해 3월 전면 무상보육을 시행했다. 그러나 재정난에 부딪혀 계속 추진이 불투명한 상태다. 정부와 지자체는 총성 없는 전쟁에 돌입했다. 보육료의 국고보조율을 20%포인트 인상하는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이 10개월째 국회 계류 중인 가운데, 정부가 2014년 예산안을 통해 무상보육 국고보조율을 10% 인상으로 제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지자체가 "그 정도로는 무상보육을 할 수 없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서울시는 내년 무상보육 관련 부담비용이 시행 전과 비교해 3257억원 증가할 것으로 추산한다. 과도한 비용 탓에 서울시는 지난 2009년 이후 4년 만에 지방채를 2000억원 발행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재정부담으로 무상보육사업 추진에 차질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국고보조율을 흥정하겠다는 것은 재정논란을 부추겨 무상보육을 중단시키겠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4대 중증질환 진료비, 100% 지원하겠다"던 무상의료 공약도 어그러졌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6월 '4대 중증질환 전액 국가부담' 공약의 이행방안을 통해 고가 항암제와 MRI 등에 한해서만 건강보험을 적용키로 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진료비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의료비를 모두 포함"이라던 대선 공약은 무색해졌다.

◆ 재정 부족하다더니 한쪽에선 예산 낭비

박 대통령의 핵심 복지공약이 이와같이 사실상 전면 후퇴하게 된 데 대해 정부는 '어려운 재정 여건 탓'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회 일각에선 빈약한 재정보다 실현 의지부족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복지부 국민행복연금위원회의 재정추계에 따르면 당초 기초연금 공약을 이행하더라도 GDP(국내총생산) 대비 기초연금 비중은 3.1%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 공적연금 지출비중이 10.8%란 사실에 비춰볼 때, 복지국가를 표방하면서도 국민의 노후를 지원할 의지가 부족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무상의료도 '겉만 번지르르한 공약일 뿐'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의 김종명 팀장(의사)은 "4대 중증질환부터 책임지겠다던 정부가 4대 중증질환조차 온전히 감당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 팀장은 "4대 중증질환 환자 부담액이 2조2200억원 수준인데 정부는 당초 공약의 25%인 5500억원 정도만 감당해주겠다고 물러섰다"며 "무상의료 공약을 100% 지키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경감 혜택이 있느냐가 중요한데 달라질 것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감당해주겠다는 일부 건강보험 확대는 전체 건강보험 보장률의 채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말로만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그나마 전면 시행된 무상보육 또한 복지수준 향상과는 거리가 있다. 전형적인 포퓰리즘으로 돈은 돈대로 쓰면서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무차별 지원으로 집에서 아이를 키우던 엄마들마저 어린이집에 애를 맡기면서 보육대란을 조장하고 있어서다.

4세 아이를 둔 전업주부 이정민씨(가명·서울 도봉구 쌍문동)는 "하루 2시간 정도 보육시설을 이용하고 싶어 어린이집에 문의했더니 어차피 나라에서 다 지원해주는데 한시간이든 두시간이든 무슨 걱정이냐는 태도를 보여 아연실색했다"며 "재정은 부족하다면서 낭비를 부르는 무차별 지원이 엄마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다"고 전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9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