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영아 달려. 더 때리란 말야 더!"
 
지난 11월24일 오후 1시경 과천에 위치한 서울경마공원 2층 발권소. 일요경마 4경주에 출전한 12마리가 1200m 코스를 달리고 있었다. 경주가 무르익어 결승선을 앞두고 출주마들의 박진감 넘치는 레이스가 펼쳐지자 경마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육두문자와 아쉬운 탄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만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소리를 내지르자 건물이 흔들릴 듯 진동이 느껴졌다.


 

[현장르포]과천벌에 '말밥' 주는 사람들
사진=머니위크 류승희 기자
 
국내 경마경주는 매주 금·토·일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30분단위로 진행된다. 서울은 주말에, 제주와 부산의 경마공원에선 주말은 물론 금요일에도 경주가 치러진다. 서울에서도 제주와 부산에서 열리는 경주에 베팅을 할 수 있다. 교차경주로 열리는 만큼 3곳의 경주에 모두 돈을 걸 수 있어 10분마다 베팅을 할 수 있는 셈이다.

고객이 한 경주당 베팅할 수 있는 상한액은 10만원이다. 사행성 베팅 근절을 위해 한국마사회가 금액을 제한했기 때문. 하지만 실제로는 10만원짜리 마권을 각 발권소에서 얼마든지 여러장 살 수 있다. 10만원짜리 마권을 10장이든 100장이든 구입할 수 있는 것. 마음만 먹으면 한 경주에 수백만원씩 베팅할 수도 있다. 베팅금액 규제가 무색해진 셈이다.
 
'탕!'

오후 1시30분. 경주 출발을 알리는 신호인 총소리가 울리자 사람들은 경주로나 중계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며 숨죽이듯 경기를 지켜봤다. 경주마들이 결승선 전방 600~700m쯤에 이르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급격히 커졌다.
 
경주가 끝난 직후 마권에 몇번을 찍었느냐에 따라 기쁨, 안타까움, 허탈감 등 경마팬들의 희비가 엇갈린다. 현장에서 자신의 마권이 적중해 감격과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마권 종이를 구기거나 찢어버렸다.

바닥에는 사람들이 버린 마권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청소하는 인부들이 청소도구를 들고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 마권'들을 쓸어 담았다. 청소인력들이 많아서일까. 경마장 곳곳이 10분도 채 안돼 깨끗해졌다.

서울경마공원은 실내외 모두 금연구역이다. 흡연실은 야외에 따로 설치돼 있다. 하지만 금연이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보안요원 눈을 피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다.
 

한 보안요원은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 금연시설이라고 말해주지만 듣는둥 마는둥 한다"면서 "이 때문에 가끔 실랑이도 벌어진다"고 전했다.


[현장르포]과천벌에 '말밥' 주는 사람들
사진=머니위크 류승희 기자
 

◆유모차 끌고 베팅…재산 탕진하는 사람들
 
경마정보지 분석에 한창인 김모(47·여)씨에게 다가갔다. 그의 옆에는 유모차가 있었다. 2살배기의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돈을 좀 땄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다 잃었지 뭐. 올 때마다 거의 만날 잃어. 재미로 해야지, 딸 생각으로 하면 안돼"라고 퉁명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김씨는 기자와의 대화 중에도 정보지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왼손은 정보지를, 오른손은 검은색 사인펜을 들고 숫자 하나라도 놓칠세라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산다고 했다. 매주 주말마다 남편·아기와 가족여행 겸 경마장을 찾는단다. 경마장을 찾은 시기는 올해로 20년이 넘었다.

그동안 얼마를 잃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걸 어찌 말로 다 표현하겠어. 상상도 못해"라며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는 잠시 후 "기자 양반이라고 했지? 여기에 재미 붙이지마"라며 의미심장한 조언을 던졌다.

유모차 안에는 추운 날씨 탓인지 모자와 두꺼운 점퍼로 무장한 아기가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가족여행으로 왔다고 하기에는 차림새가 초라해 보였다. 잠든 아기의 옷은 해지고 낡은 유모차 곳곳에는 지저분한 이물질이 묻어있었다.

김씨의 것으로 보이는 은색 돗자리에는 낡은 가방과 빈 우유껍데기, 먹다 남은 빵조각 등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잠시 후 마권을 사들고 온 남편이 김씨에게 다가왔다. 검은색 점퍼를 입고 있었는데, 행색이 초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검게 그을린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씨의 남편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기자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며 눈치를 줬다.

김씨 가족을 애써 외면하고 경마공원 야외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검은색 외투를 입은 이모(48·남)씨는 밝은 표정으로 편의점 직원에게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라며 슬쩍 말을 건넸다. 기자가 "좋은 일 생기셨나봐요"라며 참견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30배 땄어, 30배"라며 호탕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비결을 묻자 "'단식'으로 해야 배당 승률이 높다"고 귀띔했다. 경마장을 자주 오느냐는 질문에 그는 "매주 경주가 열리는 날이면 온다"면서 "20년째 경마장에 다니고 있다"고 소개했다.

하루에 얼마 정도를 가지고 오느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400만~500만원씩 들고 왔는데, 지금은 20만~30만원만 들고 다닌다"면서 "수십년간 (경마 때문에) 재산을 모두 탕진했다"고 허탈해 했다. 경마를 왜 계속 하느냐고 묻자 "그동안 잃은 것이 너무 많아서 본전이라도 찾겠다는 생각으로 다닌다"고 했다.


그는 "방금 부산경남경마 6경주 2번마에 10만원을 베팅했다"면서 "경마정보지를 보고 꼼꼼하게 분석해봤는데 2번 말이 '대가리로 들어올 확률'(우승 확률)이 가장 높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경주결과가 궁금했다. 경주가 끝나고 순위를 확인한 결과 이씨가 선택한 말은 출주마 7두 가운데 일곱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꼴찌였다.

[현장르포]과천벌에 '말밥' 주는 사람들
사진=머니위크 류승희 기자

◆'합법적인 도박장' 오명…주변 불법대출 난무
 
연매출 7조8397억원, 연간 입장 인원 1613만명. 한국마사회 작년 실적과 지난 한해 동안 경마장을 다녀온 사람들의 숫자다. 우리국민 5명중 1.6명이 경마를 해본 셈이다.

대표적인 사행산업으로 꼽히지만 일각에서는 경마를 국가가 공인한 '합법적인 도박'으로 치부한다. 건전한 레저가 아닌 자신의 인생을 걸고 베팅에 몰입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 경마장 주변에는 한탕주의에 빠져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빚을 내거나 자신의 차, 심지어 집이 넘어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익명을 요구한 마사회의 한 직원은 "수많은 사람들을 겪다보니 이제는 게임으로 즐기려고 왔는지, '한탕'을 노리는 사람인지 고객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단순히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오는 사람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면서 "혼자 와서 도시락이나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이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경마를 해본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내부직원은 경마가 금지돼 있다"며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경마는 합법적인 사행산업이지만 서울경마공원 주변은 불법시장 천국이다. 대표적인 것이 불법 사금융대출이다. 경마공원 입구 맞은편 도로에는 '자동차대출', '담보대출', '급전해결' 등 불법 사채업자들이 걸어놓은 플래카드를 쉽게 볼 수 있었다.

경마자금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고금리로 급전을 융통해주는 곳이다. 이들의 영업일은 경기가 열리는 금·토·일요일이다. 나머지 요일에는 아예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다.

이들 업체가 가장 선호하는 것은 자동차담보대출이다. 자동차등록증과 등본만 있으면 현장에서 바로 담보가치에 맞춰 현금을 빌려준다. 이자는 각 업체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월 4~5%대라고 안내한다. 여기에 자동차 관리비(주차료) 명목으로 1%의 수수료를 더 챙긴다. 하지만 실제로 대출을 받게 되면 각종 선이자 등 수수료를 내야 하기 때문에 이자는 더 높다. 

대부업체의 한 직원은 "자동차가 본인 명의인지 확인만 되면 자동차 상태를 봐서 중고차 시세의 약 50~60% 수준으로 대출해준다"면서 "대부분 일수 혹은 월수로 갚아야 한다. 일정기간 동안 상환하지 못하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때문에 담보로 받은 자동차를 매각시킨다"고 설명했다.

[현장르포]과천벌에 '말밥' 주는 사람들
사진=머니위크 류승희 기자

◆경마공원이 가족공원?
 
서울경마공원은 어린이공원, 레저·휴식공간 등 다양한 문화체험시설이 있다. 특히 어린이 승마체험 공간도 있어 주말에 연인 및 가족들이 부담 없이 들를 만한 공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가족단위 관람객은 거의 찾기 힘들 정도다. 참여율도 저조하다. 한국마사회는 지난 7월부터 매주 금요일 어린이공원 등 일부 공원의 입장권 판매를 중지했다. 이용고객이 적기 때문이다.

직장인 김나래(가명·27)씨는 "남자친구와 처음으로 왔는데 경마공원 분위기가 다소 어둡고 사람들도 많지 않아 데이트하기에 좋은 장소는 아닌 것 같다"면서 "다음에는 오지 않을 생각"이라고 불편함을 내비쳤다.
 
가족단위로 온 김정식(34)씨는 "어린이공원은 조금 다를 줄 알았는데, 공원 바로 옆에 마권 매표소와 경주 스크린이 있어 정서에 안 좋을 것 같다"면서 "집에서 가까워 일부러 가족과 같이 찾아왔는데, 다음에는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0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