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2일 동국제강 당진공장에서 만난 장세욱 동국제강 부회장은 한껏 들뜬 표정으로 이같이 말했다. 자신에 찬 모습으로 방문객과 인사를 나누는 그의 표정은 한없이 밝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날은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 1만9000㎞의 바닷길을 건너온 귀한 손님 ‘슬래브’(slab)를 소개하는 날이기 때문. 이 손님은 동국제강의 63년 숙원을 풀어줄 더없이 고마운 존재다.


슬래브 입항. /사진제공=동국제강
슬래브 입항. /사진제공=동국제강

◆10년 프로젝트 꿈 이룬 '직접 생산'
슬래브는 철강 판재류 제품을 만들기 위한 철덩어리를 뜻한다. 공장에서는 이 슬래브를 뜨겁게 달구고 강하게 짓눌러 얇은 철판으로 만든다. 따라서 이날 개최된 입고식은 원재료 격인 슬래브를 소개하는 자리다.

이번에 들여온 슬래브는 브라질 CSP(Companhia Siderurgica do Pecem, 뻬셍철강주식회사)가 만든 제품이다. 2005년 총 55억달러(한화 약 6조1655억원)가 투입된 CSP는 세계최대 철광석회사인 브라질 ‘발레’가 50%의 지분을 보유했고 사업을 기획한 동국제강이 30%, 고로 설계 노하우가 많은 포스코가 20%를 투자한 합작회사다. 브라질 북동부 쎄아라주 뻬셍산업단지에 자리했고 연산 300만톤급 고로 1기의 규모를 갖췄다.


동국제강은 CSP가 생산하는 300만톤 가운데 53%에 해당하는 약 160만톤을 사용할 수 있다. 그중 100만톤은 해외에 판매하며 나머지 60만톤을 당진공장에서 활용할 계획이다. 브라질공장을 짓기 전까진 포스코를 비롯해 국내외 업체로부터 슬래브를 공급받았다. 이날 행사가 그간의 설움을 날린 축제였던 이유다. 동국제강은 최근 당진공장에 입고된 5만8751톤을 시작으로 올해 총 25만~30만톤을 들여온다. 내년에는 수입량을 늘려 최대 60만톤을 가져온다.

비유하자면 밥을 지을 줄 알지만 논이 없어 벼를 키울 수가 없었고 밥의 원재료인 ‘쌀’을 사와야 했던 것이다. 작황이 좋을 땐 별 문제가 없지만 반대의 경우엔 다른 집 문을 두드려야 했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웃돈을 주고서라도 쌀을 구해야 연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먼 곳에나마 논을 마련했고 직접 재배한 쌀을 가져올 수 있게 됐다.

당진공장의 이날 슬래브 입고식에서 후판의 생산과정을 직접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안전모를 쓰고 공장에 들어서자 후끈한 온기가 몸을 감싼다. 바깥과는 사뭇 다른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다. 편안함을 느낀 것도 잠시. 시뻘겋게 달아오른 철판이 모습을 드러내자 꽤 먼 거리였음에도 뜨거움이 느껴졌다. 1200도까지 가열된 슬래브가 열을 뿜어낸 것. 철의 경이로움을 마주한 순간이다.


/사진=박찬규 기자
/사진=박찬규 기자

◆고품질 후판 생산… 웅장함에 '압도'

한껏 달궈진 철이 압연기를 여러번 오가며 형태가 바뀌는 광경은 신기했다. 4000톤에 달하는 압력으로 꾹 눌러 모양을 만들고 시간당 1만5000톤의 차가운 물을 뿌려 단단하게 한다. 굉음과 함께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롤러를 지난 판재는 꽤 얇아진다. 강하면서도 얇은 철판이 태어나는 순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후판은 열을 식히는 쿨링베드로 이동한다. 이때 제품의 온도는 800도에 달한다. 쿨링베드는 길이 60m, 너비 53m로 공간이 넓다. 이곳에 옮겨진 후판은 사이즈가 제각각이다. 철저히 주문에 맞춰 생산되기 때문이다. 판재를 옮길 때 롤러와 체인이 돌아가며 고막을 찌르는 듯한 굉음을 낸다. 총 길이 1.2㎞의 생산라인은 단순하지만 그 웅장함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무겁고 커다란 철을 주무르는 중공업의 멋이다.

당진 후판공장은 2010년 세워졌다. 후판은 보통 두께가 6㎜ 이상인 두꺼운 강판이고 주로 선박 건조나 건설업에 쓰인다. 이를 전기로에서 생산하는 건 한계가 있다. 게다가 설립 당시만 해도 조선·중공업은 후판의 공급부족을 겪었기에 엄청난 수입대체효과를 기대했다. 그런 이유로 그동안 슬래브를 사오면서까지 후판을 만든 것이다.

지금은 후판사업이 세계적으로 하향세지만 동국제강은 그동안 꾸준히 구조조정을 진행했고 당진 후판공장에 역량을 모은 만큼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특히 수요가 줄어든 조선용 제품의 의존도를 줄이고 BH강 등 건축용 후판시장의 비중을 키울 계획이다.

◆'퍼스트펭귄' 역할 기대

장 부회장은 “무리지어 다니는 펭귄 중에서 가장 먼저 바다에 뛰어드는 펭귄을 퍼스트펭귄이라고 부른다”면서 “동기를 부여하고 생존을 향해 선도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는 동국제강과 닮았다”고 말했다.

동국제강은 브라질 CSP의 슬래브를 통해 원가절감을 기대한다. 외부에서 수급할 때는 기본 제품가격 외에 지불해야 할 웃돈(엑스트라 마진)이 있었지만 앞으로 이 같은 비용이 최대 40%까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만드는 슬래브는 품질이 우수해 해외시장에서도 경쟁력이 충분하다는 판단이다. 우선 100만톤을 해외시장에 팔되 시장상황에 맞춰 수급량을 조절할 계획이다. 원자재가격이 꾸준히 오름세여서 매출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입장. 또한 후판제품도 비조선 비율을 40%까지 높였다. 침체된 조선업계를 탈피,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계획이다.

장 부회장에 따르면 브라질 CSP는 고로 1기를 더 세울 수 있도록 부지를 확보한 상태다. 시장상황이 나아지면 언제든 생산량을 높일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CSP가 3개 회사가 손잡아 세운 합작사라는 한계를 넘어야 한다. 새로운 계획을 실천하려면 의견을 모아야 하는데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동국제강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또다른 과제인 셈이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8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