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가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기업은 구조조정으로 수익을 내고 빚에 눌린 가계는 지갑을 꽁꽁 닫았다. 암울한 상황은 다음 정부에 더 큰 재앙으로 다가온다. 저출산·고령화 문제로 줄어든 생산인구에게 경제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머니S>는 만성불황의 터널에 갇힌 국민과 기업의 현주소를 알아보고 정부정책, 나아가 대선주자들의 경제공약을 진단했다. 또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선진국이 경기부양에 구사하는 전략을 살펴봤다.<편집자주>
#. 신상 인형을 고를 때의 설렘, 조이스틱을 움직여 집게발이 내려갈 때 느껴지는 짜릿한 손맛…. 직장인 이모씨(36)는 인형뽑기방 덕후다. 퇴근 후 일주일에 두세번은 꼭 인형 뽑기방을 찾는다. 그가 지난 3개월 동안 뽑기에 쓴 돈만 50만원에 달한다. 그의 집에는 카카오프렌즈 라이언부터 피카츄 시리즈, 최근 핫하다는 지방이 인형까지 없는 게 없다. 이씨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이만한 게 없다”며 “어차피 주머니 사정은 뻔한데 이렇게라도 기분을 내니 라스베이거스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 안 파는 것 빼곤 다 판다는 자취생의 천국. 박모씨(29)는 다이소 마니아다. 그는 자취집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이곳에서 산다. 박씨의 집에 있는 정리함부터 청소도구, 그릇, 식기대, 발매트, 인테리어용품 등은 전부 다이소가 출처다. 박씨는 “살 것이 없어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들른다”며 “예전에는 질보다 싼맛에 샀는데 최근에는 디자인과 품질도 좋아진 것 같아 구경하는 재미까지 생겼다”고 말했다. 순식간에 1만원을 쓰는 일도 다반사지만 박씨는 다이소에서 만큼은 왠지 재벌이 된 느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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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뽑기가게. /사진=머니S DB |
지난 12일 오후 홍대입구역.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인형뽑기방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100m마다 하나씩 있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 갈수록 살기 어려워지자 뽑기, 복권, 싼제품 등에서 ‘쉬운 대박’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어서다. 불황이 바꾼 거리 풍경이다.
◆뽑고 고르고…1000원의 ‘꿀잼’
인형뽑기가게는 지난해 중순부터 급격히 증가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게임물관리위원회에 따르면 ‘뽑기’로 상호 등록한 업체수는 2015년 21곳에서 지난해 11월 기준 500곳 이상으로 불어났다. ‘뽑기 열풍’을 타고 불과 2년 사이 25배 증가한 셈이다. 피규어(밀랍모형) 뽑기 전문매장 ‘가챠 샵’은 개업 1년 만에 제주까지 60개 매장이 생겼다.
인형뽑기 상품도 진화했다. 과거엔 평범한 인형, 작은 피규어 또는 라이터, 계산기 등 생활용품이 전부였다면 최근엔 카카오프렌즈 인형이나 포켓몬스터·원피스 등 인기 애니메이션 피규어, 드론(무인항공기) 등으로 다양해지고 고급화됐다. 가격도 예전엔 1000원을 넣으면 2번의 득템 기회가 주어졌지만 요즘엔 1000원에 1판이 공식화되는 추세다.
인형뽑기방에서 만난 대학생 A씨는 “1000원이 1만원 되는 것은 시간문제지만 원하는 인형을 얻었을 때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돈 걱정, 취업 걱정에 삶이 빠듯하지만 인형뽑기는 잠시나마 작은 행운을 안겨다 주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로또 판매량이 급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로또 판매량은 35억5000게임으로 사상 최대를 경신했다. 전년보다 9% 늘었다. 판매액도 3조5500억원으로 사실상 사상 최대다. 경제가 팽창하고 소득이 많아지면 로또 판매량도 늘기 마련이지만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지난해 경상성장률(약 4%)보다 2배 이상 빠르게 증가한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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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소 매장. /사진제공=다이소 |
뽑기방과 로또만 잘나가는 건 아니다. 1000원 생활용품숍으로 유명한 다이소도 인기다. 방문 때마다 손님들로 북적이는 것은 물론 매출도 해마다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과 관련업계에 따르면 다이소는 지난해 매출액 1조3055억원, 영업이익 1131억원을 기록, 전년 대비 각각 24%, 34% 증가했다. 영업이익 10억5600만원을 기록하던 2012년과 비교하면 4년 만에 106배가 넘는 성장을 이뤄냈다.
이는 경기불황 속 일명 실용소비 전략이 성장을 견인했다는 분석이다. 다이소 매장 내 대다수 제품은 5000원 이하. 이 중에서도 2000원 이하 제품들을 70~80%로 유지해 소비자로부터 가성비(가격대비 성능)가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
화장품과 건강식품, 생활용품 등을 한곳에서 구매할 수 있는 드러그스토어 역시 2013년 이후 연평균 20~30% 가파르게 성장했다. 대표적인 드러그스토어 올리브영과 왓슨스 등에서는 헬스케어·뷰티케어·퍼스널케어·건강식품·잡화에 이르기까지 1만5000여가지가 넘는 상품을 취급한다.
올리브영에서 만난 소비자 B씨는 “드러그스토어에서 대용량 제품을 주로 구입한다”며 “화장품 등과 같은 생활필수품을 안살 순 없는데 여러번 나눠 쓸 수 있는 대용량으로 사다 보니 알뜰소비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실제 올리브영이 지난해 4분기 매출을 분석한 결과 대용량 화장품 매출이 전년 동기대비 3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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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영 매장. /사진제공=CJ올리브네트웍스 |
◆헬조선 문화 만연…대리만족 삶
이처럼 불황이 바꾼 소비풍경은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헬조선’ 문화가 만연해지며 쉬운 대박 혹은 득템으로 얻는 물품에서 ‘삶의 만족감’을 찾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구체적으로 전문가들은 취업난, 월급난, 물가난 등 각종 난에 지친 이들이 작은 성취감을 느끼는 통로로 이런 불황형 소비를 선택한다고 분석했다.
증권사 한 연구원은 “경기가 나쁘다고 로또, 도박 등의 수요가 갑자기 줄어들진 않는다”면서 “불황기엔 오히려 적은 돈으로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업종에 사람이 몰리고 이런 산업들이 상대적으로 실적에서 안정세를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소비자연대 관계자는 “불황기나 저성장기에는 소비자가 싸고 좋은 제품을 찾는 실용소비 성향을 보인다”면서 “소득도 늘어나지 않고 직장이나 미래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큰 돈을 쓰지 않는 소비를 반복한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8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