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비극이 존재한다. 스스로 쟁취하지 못한 광복, 강대국간 힘의 논리에 따라 결정된 한반도의 분단과 두개의 정부 수립. 출발부터 꼬인 스텝은 곧바로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를 전후해 전국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민간인이 군인과 경찰의 총칼에 쓰러졌다.
하지만 이 시기의 참상은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다. 주범인 국가는 외면했고 힘없는 민초의 억울한 피해에 주목하는 이도 없었다. 이렇게 잊혀지는 듯했던 피해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책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호남·제주편>이 최근 출간됐다.
이 책은 한국전쟁기 폭력의 역사를 생생히 담았다. 특히 누군가가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져버릴 개인의 역사에 주목했다. 민간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처절한 아픔과 읊조림은 먹먹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지난달 25일 저자 정찬대 작가를 만나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을 간 이유를 물었다.
◆국가 폭력에 쓰러진 민초들
“고향인 전남 영암에서 나고 자라며 민간인 학살의 참상을 직접 눈으로 봤어요. 300여명 정도가 학살을 당해 이웃집들이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죠. 어릴 때는 무섭기도 했지만 자연스레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2007년 여순사건 관련 구례지역 민간인 학살사건을 조사하며 더욱 빠져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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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한별 기자 |
시사월간지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뎌 다양한 매체에서 정치 현장의 기록자로 지내던 그에게 민간인 학살 기록작업은 쉽사리 진행하기 힘든 일이었다. 조직의 일원으로 조직이 원하는 바를 행하면서 민간인 학살의 생생한 기록을 조사하기에는 물리적 제약이 많았던 것.
정 작가는 오랜 기간 고심한 끝에 2014년 조직을 벗어나 전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기록을 본격적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60~70여년 전에 일어난 일인 만큼 당시의 일을 증언해 줄 생존자의 기억이 온전치 않은 경우가 많았고 수많은 피해자의 사례 중 어떤 내용을 기록해야 할지 선택하기도 힘들었다.
“전국의 모든 지역을 다닐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자 아픔이었어요. 호남·제주편만 해도 몇개 지역을 선별할 수밖에 없었죠. 증언자 확보도 쉽지 않았어요. 세월이 흘러 많은 분이 돌아가셨거나 당시 나이가 어려 적극적으로 증언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주어진 환경에서 많은 이를 만나려 노력했어요.”
이번 작업에서 그가 중점을 둔 부분은 ‘사람’이다. 아픔이 가득한 한국 현대사에서 통사(通史)라는 틀에 가려진 한사람 한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알리고 싶었다. 정 작가는 “이 책은 역사 기록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로 그들의 질곡에서 출발했다”며 “그분들의 한, 슬픔, 상처, 눈물을 기록하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피해자 한명 한명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분들의 삶 자체가 또 다른 역사이기에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가슴 저미도록 시린 우리 역사이자 통한의 기록이기도 하다.
민간인 학살의 기록은 아군(국군·경찰)과 적군(빨치산) 사이에 끼여 현대인은 상상하기 힘든 고통과 아픔을 겪은 이들의 생생한 증언이 바탕이다. 낮에는 군인과 경찰이 마을에 들어와 좌익에 동조했다며 주민의 머리에 총구를 겨눴고 밤에는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이 같은 방식으로 주민을 학살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이 주민을 동네 어귀로 끌고 가 기관총을 난사할 때 누나를 방패막이로 살아남은 생존자, 급소를 피해 총을 맞고 도랑으로 굴러떨어져 살아남은 생존자, 들려오는 총소리에 미리 몸을 피해 화를 면한 평범한 민초의 처절한 생존기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도대체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난 것일까. 이러한 근본적 물음에 대한 명확한 답은 아직 없다. 세계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100만명가량의 민간인이 죽음을 당했지만 가해자는 침묵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고, 살아남은 피해자는 “아직도 왜 우리를 죽이려 했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한다.
“가해자 중에서도 이 학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제주에 거주하다 지난 2월 세상을 떠난 한 가해자는 인터뷰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부대원이었지만 나도 왜 이런 학살을 해야만 했는지, 동료나 간부가 민간인을 왜 죽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 했어요.”
그는 민간인 학살을 개인의 문제, 시대적 혼란, 국가의 잘못이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라고 설명했다.
“만주군이나 친일군경이 지휘관이 돼 민간인을 학살하는데 앞장섰고 일부 지휘관은 부하들에게 학살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어요. 혼란스러운 시기 계속된 살상은 학살에 대한 거부감, 죄의식 등을 무디게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승만정부는 반공이라는 초헌법적 이념에서 국가 정통성을 찾고자 했는데 결국 그 피 위에 세워진 반공국가가 70년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겼죠.”
◆학살의 기록은 진행형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은 이제 첫발을 뗐다. 호남·제주편을 시작으로 앞으로 영남, 충청, 수도권, 강원 등 다른 4개 권역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생생한 기록도 차례로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 작업의 연장선에서 정 작가는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가 책임 편집을 맡은 반헌법행위자열전사업에 민간인학살 담당 조사연구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광복 이후 독재와 군부정권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폭압정치 속에서 수많은 헌법유린 사태가 있었지만 가해자는 여전히 권력을 향유하며 호의호식하고 피해자는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에 갇혀 지내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불합리한 현실을 꼬집고 세상에 알리기 위해 2015년 시작된 이 사업은 정부수립 이후부터 박근혜정부까지 반헌법적 행위를 한 인물에 대한 열전을 ▲민간인 학살 ▲내란 ▲부정선거 ▲고문 및 간첩조작 사건 ▲언론탄압 등으로 나눠 지정한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실제와 상당부분 다른 내용도 많고 의도적으로 배제된 진실도 적지 않아요. 권력이 역사를 사유화하고 희롱한 결과죠. 많은 이가 우리 역사를 좀 더 깊이 있게 사고하고 문제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과오를 반성하지 않고 잊어버리면 같은 일이 되풀이되기 마련이다.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조각을 새기는 정 작가의 뜨거운 삶과 앞으로 남길 기록이 주목되는 이유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0호(2017년 8월9~1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