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지난해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과정에서 삼성 오너일가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합병에 찬성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검찰 수사를 받게 된 것이다. 이에 <머니S>는 국민연금의 민낯을 살펴보고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국민연금공단은 우리 국민이 낸 소중한 자산을 관리·운용하는 곳이다. 이곳이 독립적이고 투명하며 안정적으로 운영돼야 우리 국민의 노후도 편안해진다. 우리가 국민연금공단에 주목하는 이유다.
자산 500조원 이상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은 금융시장에서 ‘갑 중의 갑’이다. 다른 기관투자자들이 국민연금의 눈치를 볼 정도다. 공단은 국민의 노후자금을 튼실히 불려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 공단은 수익성, 안정성, 공공성, 유동성, 독립성이라는 다섯가지 원칙에 근거해 기금을 운용한다. 그러나 이 다섯가지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때도 있고 서로 충돌할 때도 있다. 이 경우 공단의 기금운용은 딜레마에 빠진다.
◆보신주의가 국민연금 ‘발목’
가장 많이 지적되는 문제점은 보신주의다. 민감한 안건의 경우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에 넘기는 식의 보신주의가 기금본부에 만연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문제가 발생해도 조직이 비난받을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해 6월 국민연금은 SK와 SK C&C 합병건을 ‘판단이 곤란한 중대안건’으로 분류해 의결권전문위에 결정을 넘겼다. 당시 합병비율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결국 국민연금은 의결권전문위의 의견대로 합병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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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불과 보름 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정에서 국민연금은 의결권전문위의 결정을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의사를 결정, 삼성 측의 손을 들어줬다. 이 선택은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엮이면서 국민연금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검찰은 국민연금이 삼성 측의 손을 들어준 것과 삼성이 최순실씨를 지원한 것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는지 수사 중이다.
그간 국민연금은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의 경우 이에 대한 결정권을 의결권전문위에 넘겨왔다. 이 때문에 ‘내부투자위원회에서 과반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해 의결권전문위에 판단을 넘기지 않았다’는 국민연금의 해명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분위기다. 의결권 행사를 외부전문기구에 맡기는 방식이 국민연금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수익성 vs 공공성 딜레마
사회적 책임투자가 미흡하다는 문제점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지난해 ‘국민연금법’에 사회책임투자에 대한 근거조항이 마련됐지만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국민연금은 가습기살균제로 수많은 사망자를 낳은 기업 영국 옥시레킷벤키저 주식을 지난 6월 말 기준 1450억원어치(평가금액 기준, 지분율 0.18%) 보유한 것으로 조사됐다. 가습기살균제를 처음 제조·보급한 SK케미칼에도 2305억원(지분율 13.1%)을 투자했다. 이밖에 이마트와 GS리테일, 롯데쇼핑 등 가습기살균제 관련 기업에도 주식과 채권, 대체투자 등의 형태로 총 3조1142억원을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성을 외면한 투자는 민족 정체성까지 건드렸다. 국민연금이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투자규모를 해마다 늘린 사실이 밝혀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2013년 말 51개 기업 6008억원에서 2014년말 74개 기업 7646억원으로 늘린 데 이어 지난해 말까지 77개 기업 9315억원을 일본 전범기업에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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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말에는 일본 전범기업 72곳에 8800억원어치를 투자한 것으로 집계됐다. 게다가 72곳 전범기업 중 40개 기업의 투자수익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토요타(-279.1%)와 고마쓰제작소(-127%)에 대한 투자손실이 가장 컸고 니폰제강&스미토모금속(-72.1%), 구보타(-65%), 파나소닉(-60.5%) 등의 평가손실도 적지 않았다.
사회책임투자 취지로 시작한 사회간접자본(SOC) 대출투자는 통행료 인상요인으로 지목되면서 고속도로 이용자 부담 논란으로 불거졌다. 공단은 2011년 6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북부구간 운영사인 ㈜서울고속도로를 인수해 운영하면서 서울고속도로에 1조503억원을 대출하는 계약을 맺었다. 대출금 중 7500억원은 7.2% 이율로 계약했지만 나머지 3300억원은 20~48%의 고리로 후순위채권 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서울고속도로가 부담하는 이자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북부구간(일산-퇴계원)의 통행료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총 36.3km의 북부구간 통행료는 4800원으로 km당 132원인 반면 퇴계원-일산 총 91.7km의 남부구간 통행료는 4600원으로 km당 50원이다. 북부구간의 km당 요금이 남부구간에 비해 2.6배 이상 비싸다.
이와 관련 국민연금 기금운용 관계자는 “도로통행료는 건설 당시 구간별 투입비용, 예상교통량, 정부 재정지원 정도 등을 고려해 주무부처와 해당 사업자가 실시협약으로 정한다”며 “후순위채권의 이자율 등은 통행료 수준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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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대여, 공매도 활용 논란 야기
공단의 주식대여가 증시에서 공매도를 부추겨 주가를 떨어뜨린다는 논란도 제기됐다. 공매도는 주가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는 종목을 빌려 판 뒤 실제로 주가가 하락하면 싼 값에 사서 되갚아 차익을 실현하는 투자방식이다.
국민연금이 빌려준 주식이 실제로 공매도에 이용됐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동안 연금의 주식대여에 따른 증시 흐름을 따라가 보면 공단이 기업에 주식을 대여할 때마다 해당 종목의 주가가 칼춤을 췄다. 춤을 추며 미끄러진 주가는 증시를 뒤흔들었고 흐름을 예측할 수 없는 개인투자자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국민연금이 직접 공매도를 하진 않지만 다른 기관투자자나 외국인투자자에게 빌려준 주식 상당수가 공매도에 이용되는 것으로 관측된다. 그동안 한미약품 주식을 공매도 주체에게 대여해줘 큰 수익을 올렸던 국민연금이 지난 9월 말 한미약품의 늑장공시로 1400억원가량의 평가손실을 입은 것도 ‘자승자박’이라는 평가다.
물론 국민연금도 할 말은 있다. 53조원에 이르는 국내주식 전체 대여시장에서 국민연금이 참여하는 비중은 1.2%에 불과한 데다 대차거래가 모두 공매도로 이어지는 것도 오해라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기금 운용의 투명성 강화를 통한 독립성 확보가 시급하다고 본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위원장은 “국공채시장이 그나마 안정적이지만 상대적으로 정량화되다 보니 공단으로서도 대체투자, 해외투자 등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이에 대한 투명한 거버넌스 구조를 갖추지 않으면 지금처럼 국민으로부터 온갖 의혹과 오해를 사고 앞으로 엄청난 리스크를 떠안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6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